松竹♡수필

세상 평등은

松竹/김철이 2022. 5. 17. 01:41

세상 평등은

 

                                                                             김철이

 

 

 

 내 나이 예닐곱 되던 시절 내가 살았던 동네에 비교적 큰 규모의 여관을 경영하며 갑부로 소문났던 한 가정 슬하에 16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외아들이자 4대 독자인 아들자식이 요즈음 흔히 말하는 발달장애를 지닌 채 늘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살아야 하는 제 부모 가슴에 세상 어느 그 누구도 빼주지 못할 대못을 나날이 박곤 했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 1년 열두 달 부유한 생활을 누린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자식 농사가 대흉작인걸.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기엔 상상도 못 할 처지이니 아들자식이 제 이름 석 자는 쓰고 읽게는 해 주어야 한다는 부모 심정으로 가정교사를 들였으나 공염불에 불과했으며 그 아이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탄배달 수레나 자청하여 밀어주거나 도와준다는 핑계로 혼자 걸어도 비틀거릴 지게꾼 뒤에 매달리다 지게꾼의 걸쭉한 욕이나 얻어먹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부모님은 돈이 아무리 많은들 아들자식을 위해 해 줄 것이 없으니 일찌감치 장가를 보내 가문의 대나 이어야겠다는 소망으로 그 아이의 나이 스물이 되던 해 그 아이보다 세 살이나 많은 가난한 가정의 장녀를 돈으로 사다시피 데려와 초례를 치렀는데 나이만 먹고 덩치만 산만 했지 지능은 두서넛 살 먹은 아이와 같았으니 여자를 광대 굿 보듯 했고 첫날밤부터 소박 아닌 소박을 맞아야 했던 여인은 1년여 독수공방하다 가정지방법원에 혼인 무효 소송을 제출한 후 친정으로 되돌아가고야 말았다. 스물한 살의 그 아이는 그 얼마 후 원인 모를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불운의 한 생을 마쳤는데, 그 아이의 생애 비해 나의 생애는 하늘이 내린 축복의 생이란 걸 그즈음에서야 깨달았다. 전신엔 비록 중증의 장애를 지녔지만, 인지력 만은 누구보다 올고른 상태로 인생 육십을 살았으니 말이다.

 

 불운의 인생 스물한 해밖에 살지 못했고 죽음마저 불운의 죽음을 맞아야 했던 그 아이의 영혼만은 어느 영혼보다 행복한 넋의 삶을 살리라 믿지만, 금이야 옥이야 했던 아들자식의 무덤을 피멍이 시퍼렇게 든 가슴에 섰던 그 아이 부모님의 심정은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아이의 부모는 내 부모님과 마주칠 때면 내 이름을 들먹이며 철이를 슬하의 자식으로 둔 당신 내외는 천복을 지닌 사람들이라 부러워하며 칭송하였다.

 

 그 아이가 살아생전 내게 건네주었던 세 가지 선물이 있었다. 당시 그 아이와 전혀 무관한 물건으로 여겨졌던 몽당연필과 새까맣게 손때가 묻고 동강 난 지우개와 반은 찢기고 반은 꼬깃꼬깃 구겨진 스케치북 한 권이었는데, 나보다 한 살이 많았던 그 아이 나이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늦은 겨울, 그날도 어느 이의 연탄 손수레를 밀어주고 사시사철 대문과 현관문을 열어놓는 우리 집 앞을 지나가다 마루에 앉아 만화책을 읽으며 어눌한 손놀림으로 누런 연습장에 만화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따라 그리고 있던 나를 봤는지 새까만 연탄 가루로 온통 환칠을 한 얼굴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누런 콧물을 윗입술까지 빼문 채 대문 뒤에 숨어 빼꼼히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칠 양이면 황급히 대문 뒤에 온몸을 숨기길 몇 차례 그땐 무슨 생각이었던지 모르지만, 만화책을 모방해 그리던 내가 손을 멈추고 그 아이가 대문 안쪽으로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얼굴을 대문으로 들이미는 그 아이를 손짓으로 불러들였다. 나의 손짓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 아이는 계면쩍은 듯이 피식 웃더니 해변의 게처럼 옆걸음으로 슬그머니 걸어 들어왔다. 대문 안으로 들어온 아이는 마루 한 귀퉁이에 엉덩이만 살짝 걸친 채 걸터앉아 내가 그리다 둔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니 무슨 생각을 떠올렸던지 언어장애가 심했던 탓에 버벅거리며 손짓·발짓 다 동원하여 나더러 잠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불이 나게 자기 집으로 달려가 가져온 것이 몽당연필, 동강 난 지우개, 찢기고 구겨진 스케치북이었다. 나 역시 심한 언어장애를 지녔던 터에 지능 장애를 지닌 그 아이와 소통하기가 쉽지 않아 갖은 방법을 죄다 동원하여 소통한 결과 그 세 가지의 학용품은 다른 공부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동그라미 그리기에만 열심이라서 그 아이의 부친이 동그라미라도 그리며 놀라고 한 다스의 연필과 열 개의 지우개와 세 권의 스케치북을 사준 것이었다. 동그라미를 얼마나 많이 그렸으며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웠으면 연필이 몽당연필이 되었고 지우개가 너덜너덜 걸레가 되었을까, 스케치북을 펼쳐보니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지웠던지 그 흔적이 뚜렷했었다. 그 세 가지 학용품은 더는 자신에게 필요 없으니 날 주겠다는 것이었다.

 

 평소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엉뚱하게 가끔 생각이 났던지 예상도 못 할 때 툭 튀어나오듯 내게 들려 자기가 먹다 남은 과자 등을 가져다주곤 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나이는 분명히 나보다 형이지만 마치 어린아이에게서 과자를 얻어먹는 느낌이 들어 탐탁지 않게 여겼던 터라 내겐 아무런 필요성이 없었던 학용품들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 그래도 날 생각해서 가져다준 건데 하는 생각에 웃으며 받긴 했지만 내겐 아주 귀찮은 천덕꾸러기였다. 쓸모가 없으니 내다 버리려 해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천진난만한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쉽사리 버릴 수가 없어 내 물건만 보관하던 벽장 속 한쪽에 몇 달을 방치해 두었었는데 며칠 후 그 아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아이 부모가 아이 죽음의 사유를 밝혀달라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동네에 한 번 나와 그 아이 신상에 관해 몇 가지 물어가더니 소식이 깜깜 아이의 부모와 몇 분의 동네 어른이 항의 방문을 하였으나 동네 천덕꾸러기 하나 죽은 것 가지고 뭘 그리 유난을 떠느냐는 식의 태도였다. 그 아이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아이가 남긴 세 가지 학용품에 대한 존재 여부를 까맣게 잊고 있었으나, 이듬해 봄 어머니께서 집안 대청소를 하시다 말고 그 아이에게서 받아둔 학용품들을 보시곤 그 물건들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도 전에 사용하다 쓸모가 없으면 내다 버릴 것이지. 궁상맞게 이다지도 허접한 물건을 집안에 두면 어떡하냐며 한동안 귀 고막이 먹먹했을 정도로 성미 급하신 어머니 입질에 걸쭉한 꾸중을 오뉴월 소나기처럼 쉴 틈 없이 들었었다. 욕을 먹을 짓도 하지 않았는데 푸지게 욕을 얻어먹고 나니 아무리 모자지간이긴 하지만, 분하고 억울해서 앞발을 마루 끝에 걸쳐 얹어 방안을 들여다보던 누렁이에게 화풀이를 쏟아부었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나의 화풀이를 한 몸에 다 받은 누렁이는 내가 원망스러운 듯 꼬리를 두 다리 사이에 감춘 채 눈을 힐끔거리며 마루를 내려갔고 시간이 흐른 뒤 자초지종을 들으신 어머니는 그 아이가 너를 아주 많이 좋아했나 보다. 라고 하시며 그 물건들은 네가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부모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어머니 의견에 따르기로 했었다.

 

 어머니는 그 아이의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불러 아들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학용품을 자연스럽게 전해주려고 묶은 김치 우거지를 씻어 점심때 쌈이나 싸 먹지며 오라고 했더니 두 어머니는 평소 같은 심정으로 생활했던 터라 아무런 생각 없이 응해주었다. 점심상을 물리고 이 얘기 저 얘기하며 한참 시간을 보내다 어머니께서 내게 눈을 껌뻑거리며 세 가지 학용품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세상 부모 심정 다 그렇듯 비명횡사했던 아들자식을 향한 마음을 드러낸들 어찌 온전히 들어낼 수 있었겠는가, 그 아이가 남긴 세 가지 학용품을 보신 아이의 어머니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더니 세 가지 학용품을 어루만지며 대성통곡을 하시는 것이었다. 한참을 울고 난 후에 하시는 말씀이 이십 년을 모자지간으로 살았지만 내겐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나더니 네겐 제 목숨처럼 여기던 물건들을 남겼구나. 하시면서 세 가지 학용품에 얽힌 사연을 말씀해 주셨는데 아무리 많은 새 학용품을 사다 줘도 소 닭 보듯 하며 굳이 그 몽당연필에다 동강 난 지우개 찢기고 구겨진 스케치북만을 고집했는지를 듣고 나니 그 아이가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영혼을 지녔음을 깨달았다. 그 아이 열두 살 때 아래채에 고무공장에 근무하던 나이 어린 여공이 세 들어 살았었는데, 하루는 그 여공이 월세를 주러 위채에 올라왔다. 마냥 무료하게 앉아있던 그 아이를 보고는 급히 나가 문제의 세 가지 학용품을 사다 주며 그림으로 마음을 표현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말씀을 마친 그 아이의 어머니 누구에게도 만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세 가지 학용품을 철이 네게 가져다준 걸 보면 기철이가 스물한 해 동안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연 이는 너뿐이고 너를 참 벗으로 여겼던 것 같으니 너만 괜찮다면 네가 보관하다 처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하시기에 맡긴 맡았지만, 세 가지 학용품을 천덕꾸러기로 여겼던 적도 있어 적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그 후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내가 장애 해방 운동가로 나설 무렵 하룻밤 꿈에 그 아이가 찾아와 그동안 보잘것없는 천덕꾸러기 맡아줘서 고맙다며 큰일을 하러 세상 밖으로 나갈 네게 더는 맡아달라고 할 수 없어 자신이 가져갈 테니 세 가지의 학용품을 불살라 달라는 것이었다. 꿈에서도 말을 하는 그 아이 행동에 너무 놀라 물었더니 여기선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차별하지 않으니 모두가 다 평등한 거야. 너도 그 평등 세상을 구현하러 세상 밖으로 나서려 하잖아, 나는 여기서 너는 거기서 평등 세상을 만들어 나아가는 데 있어 힘을 아끼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 꿈이 주는 메시지의 뜻은 대충 깨달았고 그 아이가 살아생전 동그라미만을 고집했던 것도 세상 평등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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