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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2022 04 01/ 나는 성당으로 파견 받는가, 성당에서 파견 받는가?/ 사순 제4주간 금요일

松竹/김철이 2022. 3. 31. 17:55

2022 04 01/ 나는 성당으로 파견 받는가, 성당에서 파견 받는가?/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GKkf3GiAKy0

 

 

 

 

 

 

2022년 다해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성당으로 파견 받는가, 성당에서 파견 받는가?

 

오늘 복음의 시기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포도 수확 철에 가을걷이를 도둑맞지 않으려고 초막을 치고 농장을 지켰던 가나안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전통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초막을 치고 살았던 시절을 되새기는 새로운 축제로 바뀐 것입니다. 초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친 초막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막을 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

축제는 이렇듯 무언가를 기억하며 그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굳이 시기가 초막절이라 말하는 이유는 초막절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남모르게 올라가십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치르시려는 초막절이 그들이 원하는 초막절에는 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메이아일 수 없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인데 자신들이 알 수 있는 곳에서 온다면 구원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 떼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야 하는 목자는 양 떼가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와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동의하시면서 결국엔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오셨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그 아버지를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신 곳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곳입니다. 아버지가 계신 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 초막절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영화 안테벨룸’(2022)의 줄거리입니다. 남부 연합군이 운영하는 루이지애나 노예 농장, 노예들은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말을 누군가 먼저 걸어주지 않으면 말도 한마디 하지 못합니다. 탈출 시도하는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그들의 시체는 화장당합니다. 그들을 도왔던 이든이라는 여자는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장군에 의해 낙인이 찍힙니다. 이든의 친구인 줄리아도 매를 맞아 유산합니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 전화벨 소리가 들립니다. 이 모든 것은 꿈이었던 것입니다. 이든은 본래 베로니카 헨리 박사라는 유명한 사회학자입니다. 그녀는 인종차별에 대해 TV 토론 쇼에서 강력한 발언을 합니다.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고 우버를 타고 레스토랑을 나가는데 실제로는 엘리자베스가 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남편 재스퍼가 베로니카를 때려눕힙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전 내용에서 이든과 흑인 노예들을 부리던 백인 부부였습니다.

베로니카가 눈을 뜨니 다시 과거의 농장입니다. 농장에서 베로니카는 줄리아가 목을 매 죽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분노한 그녀는 일라이에게 그날 밤 탈출할 거라 말합니다. 일라이는 이든과 함께 탈출하려다 아내를 잃은 남자입니다. 사실 현재 노예 생활하는 장소는 우리나라 민속촌과 같이 과거 시대를 재연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실제 목화를 따는 흑인들이 납치되어 말도 못 하고 실제 노예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로니카는 다시 한번 오두막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장군의 전화를 훔칩니다. 장군이 베로니카를 공격하는데 일라이가 베로니카를 보호하다 살해당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총검으로 장군을 찌르고 전화기 잠금 해제하고 GPS를 사용해 남편에게 위치를 보냅니다. 베로니카는 그와 다른 병사들을 화장터에 끌어들이고는 불을 지르고 장군의 말을 훔쳐 타고 나갑니다. FBI가 들이닥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 장소를 부수어버립니다.

 

다른 모든 납치되어 온 흑인들은 이 집단이 너무 무서워 조금씩 자신의 신원을 잊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야 적어도 생존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로니카만은 자신이 갇힌 곳에 딸이 그려준 그림을 새깁니다. 그 그림을 보고 만지며 자기 집이 본래 어딘지 잊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문에 왁스를 바르고 방에서 걸을 때 바닥의 나무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을 외워둡니다. 그리고 장군이 쓰는 핸드폰을 두는 위치를 기억하고 결국엔 자신만이 아니라 그곳의 모든 이들을 해방합니다.

내가 본래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온 곳으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기억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로부터 온 분은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나자렛 출신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출신입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의 의미임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예루살렘이 목적지였지만 예수님은 이 축제 때 당신의 목적지는 천국임을 되새기시는 유일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에 성당으로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의 초막은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 나가서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잊지 않고 살게 됩니다. 성당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집 밖에 천막을 짓고 일주일을 삽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기억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이를 기억하게 하는 초막이 지금의 성당입니다.

 

영화 집으로에서 아이는 버릇이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할머니와 지내면서 남도 생각할 줄 아는 모습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아이는 할머니에게 가슴을 쓸며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영화 제목이 집으로인 이유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집으로일까요, 아니면 다시 힘들 때 돌아와야 하는 집이 할머니라는 의미일까요? 아무리 봐도 후자일 것입니다. 사랑이 주어지는 곳이 참으로 집입니다.

따라서 성당에 올 수 있음에도 TV를 보며 미사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로만 부모님을 만나면 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전에 직접 와야 하는 이유는 베로니카처럼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진짜 집이 성당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성당으로 파견받는 것이 아니라 성당에서 집으로 파견받는 것입니다. 성당은 추리가 축제를 지내야 하는 초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