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길

주현미 - 영등포의 밤(1963)

松竹/김철이 2022. 2. 9. 16:11

주현미 - 영등포의 밤(1963)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LnI7tBvwicc

 

 

 

 

 

노래 이야기

 

1960~1970년대를 대표했던 선 굵고 매력적인 저음 가수 오기택 선배님의 별명은 저음의 마법사였습니다. 목소리 자체에 중후하고 그윽한 감정이

배어있어서 오기택 선배님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을 뺏기는 분들이 참 많았는데요.

 

전남 해남이 고향이었던 오기택 선배님은 고등학교 때

서울로 상경해서 학업을 마친 다음 지금 신세계 백화점의 전신이었던

동화백화점에 입사했고요. 같은 건물에 있던, 가수 고복수 선생님이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 입학해서 가수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다, 196112, 오기택 선배님은 제1KBS 직장인 콩쿠르에

동화백화점의 대표로 출전해서 당당하게 1등을 차지했는데요.

이때 부른 노래가 창작곡인 비극에 운다라는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동화예술학원의 지도교사였던 작곡가 장일성 선생님이

대회 출전용으로 만들어 준 창작곡이었는데요.

사실, 요즘 경연대회도 마찬가지고, 콩쿠르에서는 일반적으로 관객이나

심사위원들에게 친숙한 곡을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생전 처음 듣는 창작곡으로 대회에 출전했다는 것은 그만큼 가창력에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게다가 창작곡으로 1등까지 했으니

오기택 선배님의 가창력은 누가 봐도 최고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대회를 TV 중계로 지켜본 작곡가 김부해 선생님은

오기택 선배님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고요. 오기택 선배님을 찾아가서

만나자마자, 작곡가 원로들의 모임인 한국작가동지회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 사무실에는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가요작가들이 모여 있었는데요. 전수린, 형석기, 손목인, 박시춘, 반야월, 조춘영 선생님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모두에게 인정받은 오기택 선배님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김부해 선생님이 문예부장으로 있었던 메이저 음반사, 신세기 레코드와

전속가수 계약을 맺은 후, 1963. 가요계의 명곡이라고 손꼽히는

영등포의 밤으로 스물 네 살의 나이에 데뷔하게 됩니다.

 

김부해 선생님이 작사, 작곡한 영등포의 밤은 노래가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는데요. 그 당시만 해도 영등포는 석탄 더미로 뒤덮인 공장 지대로, 비가 오면 진흙 때문에 장화 없이는 걸어다닐 수 없다고 해서

진등포라고 불렸던 곳이었습니다. 그만큼 공장에서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생계를 이어가던 서민들이 많았던 동네였는데요. ‘영등포의 밤에서는 그런 영등포를 사랑이 가득 찬 낭만의 거리로 묘사했기에

이 노래는 특히 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죠.

 

 

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가슴에 안겨오는 사랑의 불길

고요한 적막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

~ 영원히 잊지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가슴을 파고드는 추억어린 영등포의 밤

영원 속에 스쳐오는 사랑의 불길

흐르는 불빛 속에 아련한 그대의 모습

~ 영원히 잊지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산업 현장에서 고단하게 살았던 서민들의 꿈과 애환을 담은 노래

영등포의 밤은 그 인기에 힘입어 1966년 강민호 감독님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가 제작됐는데요.

영화 영등포의 밤은 슬픈 사랑의 멜로 드라마였습니다.

6.25로 인해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게 된 한 여인이, 혼자 딸을 낳고 키우면서 온갖 고초를 겪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다시 만날 거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다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남자와 다시 재회했지만, 그는 이미 불치의 병에 걸렸고요. 결국,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서 숨을 거둔다는 가슴아픈 이야기였죠. 김승호, 남궁원, 엄앵란 선생님이 주연을 맡았던 이 영화의 주제가로 오기택 선배님의 노래가 쓰이면서 또다시 이 노래는 더 큰 사랑을 받게 됐습니다. 그 당시 동백 아가씨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음반판매를 기록하면서 오기택 선배님은 이후, ‘아빠의 청춘’ ‘고향무정’ ‘충청도 아줌마등의 수많은 히트곡을 노래했는데요.

 

그러다 60년대 후반, 정상을 질주하던 오기택 선배님들의 노래들은 일순간, 방송에서 모조리 자취를 감추는 일이 발생합니다. 워커힐 호텔의 한 외국인 전용클럽에서 오락을 하고 있는 선배님의 모습이 한 방송국 PD에게 목격되면서, 이 소식이 방송에 보도되었고요. 전속사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오기택 선배님은 PD를 찾아가 거칠게 항의하다가 괘씸죄까지 적용되면서 방송에서 더 이상 오기택 선배님의 노래를 내보내지 않은 거죠.

 

결국, 오기택 선배님은 국내에서의 연예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일본에서 6년 동안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면서 일본 진출을 모색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고요. 중도에 귀국해서 70년대에는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직을 맡아 선후배 가수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헌신했는데요. 만능 스포츠맨으로 골프와 낚시를 즐겼던 오기택 선배님에게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오고 맙니다. 혼자 낚시를 갔던 무인도에 폭풍이 닥치면서 그만 실족사고를 당한 오기택 선배님은 절벽에 매달려 24시간을 버티며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지만, 그때의 사고 때문에 뇌졸중으로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죠. 폭풍우가 닥쳤을 때도, 절벽에 매달려 노래를 부르면서 정신을 잃지 않았던 오기택 선배님이었기에,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오기택 선배님은 꾸준히 재활치료에 힘쓰고 계시고요. 2010, 영등포구청에서 구민에게 추억과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과거 경성방직 영등포 공장이 있었던 위치에 건설된 타임스퀘어 문화광장영등포의 밤노래비를 세웠을 때, 오기택 선배님은 휠체어를 타고 직접 참석하셨죠.

 

영등포의 밤노래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던 시절.

산업사회의 주역들이 땀을 흘렸던 이곳에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이 노래비를 세운다’.

 

고단했던 시절, 수많은 노래로 서민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던 오기택 선배님이 아무쪼록 건강하시기를, 그리고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줬던 것처럼 오기택 선배님도 외롭지 않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시기를

후배로서 팬으로서 간절하게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