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은 없다.
김철이
국내 TV가 흔치 않았던 시절, 모 라디오 방송의 주간 다큐멘터리 “절망은 없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된 바 있는데 불치병환자, 고시합격고학생, 전과자 등 갖은 절망과 역경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보람에 찬 오늘을 몸소 이루어낸 각계각층 사람들의 실제 삶의 이야기를 단막극으로 엮어 방송하는 형식을 갖춘 프로그램이었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수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고 또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 열한 살 철부지였던 나는 “웃기네, 절망은 있다.”라고 빡빡 우기곤 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줄곧 갖은 고생 다 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며 느꼈던 나로서는 절망(絶望)이란 단어의 뜻을 부모님께 전해 듣고는 “절망은 없다.”라는 프로그램을 향해 40년 동안 갖은 핀잔을 퍼부었다. 물론 그 프로그램 주인공들의 사례가 실화라는 것은 능히 인정하면서도 그리 편치 못했던 가정환경을 향한 반발심 탓에 이러한 행동거지를 그 프로그램이 종편 된 1977년 10월 10일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을 삐딱하게 보았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봉의 말단 하급직 공무원이 병든 자식을 데리고 남의 곁방살이 전전하며 천진난만한 동심을 멍들게 할 수 없다는 생각과 이미 어른들의 실수로 평생 씻어줄 수 없는 영(靈)과 육(肉)에 더없이 아픈 상처를 안겨줄 수 없다는 부모 된 심정으로 자택(自宅) 한 채 마련하고자 부부가 손톱 발톱 잦아드는 줄 모르고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남편은 공무가 끝난 이후의 시간을 쪼개 자신이 지닌 수도와 전기 기술로 실비 봉사하며 공사주가 수고했다고 담뱃값이나 하라며 건네주었던 몇 푼의 돈마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꼬깃꼬깃 모았으며 아내는 한 가정의 가정주부의 역할은 물론 중증장애아는 물론 두 살 아래인 딸아이까지 단손에 돌배기 전후의 아기 둘과 조금은 자랐다지만 여섯 살 된 장남을 포함하여 고만고만한 아이 셋을 거의 혼자 수발해야 하는 처지에서도 손 놓고 남편만 바라볼 수 없어 성냥갑 걷지 붙이는 부업을 했다. 주인집 가운데 다다미방과 종이 문 한 짝을 칸막이로 사이에 둔 남의 집 뒷방에서 겨울엔 햇살이 들지 않으니 방바닥이 엉덩짝의 덕을 보려 한다는 우스갯소리에 걸맞게 방 안에 앉아 있어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으며 여름엔 통풍이 되지 않아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가족이 온몸에 땀띠를 달고 살아야 했다. 이 척박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먹어야 할 것 먹지 않고, 입어야 할 것 입지 않고 눈물겹도록 한 품 두 품 모아가던 3년 6개월 만에 지붕만 덮여 있고 기둥만 세워져 있던 철도관사 한 채를 마련했다. 온갖 사계절 바람이 자유로이 숭숭 드나들 정도의 허름하고 낡은 집 한 채를 사놓고도 부모님은 얼마나 좋았으면 온종일 굶어도 배고픈 줄도 모를 정도로 행복하다고 했다.
전 주인이 얼마나 험하게 사용했으면 밤에 자려고 누우면 허물어진 기와 사이로 별이 보였고 사방으로 불어 드나드는 바람의 자유로운 왕래로 산만해서 좀 채 단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 집을 매입했던 시기가 때마침 비가 흔한 계절 여름이어서 비만 내릴 양이면 새는 기와 틈새로 흘러내리는 빗물 탓에 세숫대야, 빨랫대야, 양동이 등이 총동원되는 촌극이 연출되었다. 집을 수리하자니 몇 년에 걸친 고생 끝에 간신히 집 한 채 마련한 처지에 수리공들의 임금과 재료비 등으로 들어갈 액수가 엄청나 엄두가 나질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내외가 손수 수리하는 것이었다. 큰 힘이 요구되는 막노동은 부친의 몫이었고 허드레 뒷일은 죄다 모친의 몫이었다. 난생처음 맞닥뜨린 집 수리일은 부모님의 손톱 발톱이 남아나지 않게 했었다. 대여섯 달이나 소요된 집수리는 부모님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특히 평소 몸이 약하셨던 모친은 집수리가 끝나자 긴장이 풀려 몸져누워 열흘을 앓으셨다. 극도의 피로가 밀려와도 내 집을 갖게 되었고 말로 표현이 어려운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해도 그 모든 것이 내 집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감수 인내할 수 있다며 마냥 좋아하셨다.
이러한 한 가정의 행복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그저 소박하게 살고 싶어 하는 서민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선량한 민생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은 5·16 군사 정변이었다. 구실이야 어찌 됐든 실질적으로 군사 쿠데타였던 5·16 군사 정변이 발발하고 군사 독재정권 수립 이후 무슨 똥 바람이 불어 군사 독재정권이 내놓은 정책에 따르면 개인의 수고와 노력으로 자택을 취득했다 하더라도 관사(官舍)는 국가 기관의 소유이니만큼 국민 된 도리로 국가 정책을 따라야 하는 한편 관사는 철도관사 관리법에 따라 상급자인(4급 갑 이상) 자만 한해 배당해야만 하므로 당시 5급 갑이셨던 부친은 철도관사를 배당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뼈 빠지게 노력해서 한 품 두 품 모은 돈으로 정당하게 취득했고 피땀 흘려 단장해 놓은 자택을 비워주어야 한다니 천지 세상 그 어떤 국가에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악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가진 자의 것을 조금 떼서 없는 자에게 주어도 난리가 날 판국인데 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 가진 자에게 준다니 지나가는 똥개가 들어도 박장대소를 검치 못 할 일이 아닌가? 더욱이 귀가 막히는 것은 일제강점기에도 공출이란 미명하에 갖가지 형태의 수탈은 있었다지만, 한 국가가 국가 의무사항 둘째 법률의 의무조항에도 엄연히 제정되어 있음에도(사회의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불의나 억압에서 보호하는 것) 불구하고 오히려 국가가 본연의 의무를 저버리고 약자의 자가 재산을 국가 정책을 핑계 삼아 강자에게 떠넘겨주는 악법을 자행해도 된단 말인가?
집수리를 마무리하고 씻은 손끝에 물도 채 마르기도 전에 철도관사 상급자 우선 배당이라는 악법이 입소문을 통해 전해 듣고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신 모친은 끝내 화병을 얻어 자리에 누워 타인의 수발을 받아야 하는 실정에 놓였다. 그 누가 말했는지 몰라도 법에도 마음이 있고 눈물이 있다.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 철도청으로부터 우리 집으로 배당받아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은 홍모 씨는 비열하게 부친이 출장 가신 틈과 모친이 병석에 누운 틈을 타서 십여 명의 힘이 세고 무식한 기술직 직장동료를 앞장세우고 자신의 본 가족은 물론 연로하신 부모님까지 동원해 남의 집을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병석에 누워 골골하는 여인네와 일여덟 살 안팎의 아이 셋을 상대로 강압적 행동을 한다는 것은 짐승보다 못한 행위가 아닐 수 없질 않은가? 그들은 중환자의 몸으로 자식과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고 결사 저항하던 모친을 거대한 가전 도구로 밀어붙여 실신을 시키는 인간답지 못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네들 소식통에 의해 부친이 울산 출장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어 간다는 풍문이 들리고 사람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덜컥 겁이 난 그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환자에게 응급 처치할 생각은 않고 책임을 모면하려고 앞다투어 달아나거나 집 안팎에 숨기에 급급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우리 집을 배당받아 들어올 홍모 씨는 정신은 정의에 불타고 육체는 복싱선수로 다져진 부친의 인품을 미리 전해 듣고는 남자 체면도 내팽개친 채 화장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겠는가? 이뿐 아니라 모친에게 폭행을 가했던 자들을 잡아다 책임을 추궁하니 그들은 하나같이 책임을 회피했다. 이에 더욱 격분한 부친은 반쯤 시신이 된 채 누워있는 모친을 둘러업고 연산동에서 거제동에 위치했던 모 개인병원까지 한 시간 15분 이상 소요되는 3.7km의 거리를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뛰고 걸어서 병원을 찾아 5주 진단서를 끊었다. 이유 불문하고 마땅히 폭행을 행사한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하고 병석에 누운 여성을 상대로 십여 명의 남성이 집단폭행을 가했다는 것은 그들과 같은 남자이기 때문에 도저히 묵고 할 수 없다며 그들을 법적 고소할 결심을 굳히셨다. 소속은 달랐지만 미우나 고우나 같은 철도원 처지라 고소장을 접수하러 동래경찰서로 가기 직전 고소장을 손에 들고 마지막으로 모친의 심경을 물어보셨는데 자신의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자존심마저 갈기갈기 찢어 만신창이로 만든 그들을 용서해 주라는 단어가 모친의 입 밖으로 나오자 부친은 당신의 청력을 의심하며 새삼 물어보니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이 고만고만한 자식들이 있을 텐데 이번 일로 인해 아비들이 전과자가 된다면 그 자식들 앞길에 걸림돌이 될 거고 근본적 이유는 불문하고 자기네 아비들을 고소한 우리를 원망할 거고 그 원망의 끈이 풀려 우리 자식 대까지 내려갈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 후 국가 악법의 폭력에 밀려 부모님의 피와 땀이 잦아든 그 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부모님은 평생 그 집을 가슴에 묻고 살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이렇듯 인심은 천심이라 하였는데 선량하게 살려 소박한 마음을 지닌 국민의 올 고른 삶의 지표를 깡그리 무너뜨리는 국가 정책이 주변을 맴도니 어찌 내 입에서 “절망은 있다.”라는 악다구니가 절로 새 나오지 않겠는가? 그 당시 우리 가정과 같은 피해를 보았던 가정이 연산2동 철도관사 114가구 중 절반 이상이었다.
그 후 나는 곪을 대로 곪았는데 고름은 터져 나오지 못하고 지독한 악취만 풍겨 내는 세상 종기(腫氣)들을 필설(筆舌)로 건드려 터뜨리기 위해 문학 작가의 길을 자청하여 걷고 있으며 현재는 여섯 장르 등단 작가로 활동 중이지만, 때때로 “하늘을 올려다보지 말고 땅을 내려다보며 살아야 한다.”라는 부모님의 드높은 교훈을 골백번도 더 가슴에 새기며 낮은 곳만 보며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해보지만 하나 가지면 둘이 갖고 싶고 둘을 지니면 셋을 지니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올려다보지 않으려 해도 눈꼬리는 절로 위를 향해 치켜 올라갔고 고개는 가진 자들을 향해 잽싸게 돌아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눌한 손놀림으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를 애써 끄집어 내렸고 돌아간 고개를 억지로 반대쪽을 향해 밀어 돌려놓았다.
“보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봐야 그들이 어떡해, 높은 자리에 가진 자리에 머물게 됐는지 배울 게 아니냐”는 이도 있었지만, 겸손해서가 아니라 나는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높은 자들, 가진 자들을 올려다보고 돌아다 본들 상처받고 아파하는 건 나뿐이라는 걸 철부지 어린 나이에 미리 깨우쳐야 했다. 지금쯤 내 부모님은 돌아가신 넋의 심장에 영영 풀지 못한 응어리로 품고 가셨을 그 집에서 국가 악법의 부당한 인권침해도 받지 않고 상처를 줄 자 손길 없이 두 양주(兩主)가 오순도순 다복한 영혼의 삶을 살고 계실 테지…
'松竹♡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의 텃밭 (0) | 2021.09.01 |
---|---|
내 이름 석 자 (0) | 2021.07.07 |
참새와 개미 2부작 2부 (0) | 2021.03.24 |
참새와 개미 2부작 1부 (0) | 2021.01.27 |
잃어버린 정(情)을 찾아서 (0) | 2020.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