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석 자
김철이
좋은 이름을 가진 자는 인생에 반은 성공한 것이다. 이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자기의 이름 석 자다. 이러한 명언에 관해 반론을 제기하는 한편 내 이름 석 자에 관한 설(說)을 글로 옮겨보려 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지니는 것이 이름 석 자다. 세상 모든 것 타인들과 모든 것 죄다 나누어도 유독 나눌 수 없는 것이 이름이기도 하다. 한 인생에 있어 이름은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가정에 후세가 태어났을 시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출세 가도를 달리는데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지거나 많은 재산을 축적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질 시 적지 않은 시간적 금전적 투자를 불사하며 전국 유명 작명가를 찾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속적 견해처럼 좋은 이름을 지닌 자는 천지(天地)의 복을 받아 무한 질주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많은 제물도 축적할 수 있다면 반대로 좋지 못한 이름을 지녔거나 시간적 금전적 투자능력을 지니지 못한 탓에 계명하지 못한 자들은 천복(天福)을 받을 수 없어 늘 부족하고 늘 가난한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인데 그렇다면 좋은 이름을 지녔거나 좋은 이름으로 계명한 자들이 받는 모든 혜택이 진정 공평하기 그지없는 천지(天地)가 내린 천복(天福)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육십 평생 동고동락해 왔던 내 이름 석 자에 얽힌 설(說)은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다. 내가 태어났던 가문(家門)은 자손 대대로 손(孫)이 귀해서 후손이 태어났다 해도 단명(短命)하기 일쑤였고 나 역시 장애를 지닌 채 육십 평생을 살아야 했으며 촌수 가까운 일가(一家) 중에 장애를 지닌 이 도 몇이 된다. 설의법(設疑法)과 수사법(修辭法)으로 꾸미고 다듬어진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후손들 명이 짧고 장애를 지니게 된 연유가 조상(祖上) 탓도 항렬(行列) 탓이 아니었을 텐데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유아기에 하룻밤 불나비 만남처럼 떠나보내야 했던 나의 부친은 가문 어른들의 급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항렬(行列)을 따르지 않고 셋째 아들은 세상 갖은 풍파 온갖 병마 다 이겨내고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는 소망으로 “차돌”이라 넷째 아들인 나의 이름은 성한 사대육신을 지니고도 살아내기 버거운 세상사에서 중증의 장애를 지녔으니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노도처럼 밀려와도 강철처럼 이겨내라는 뜻으로 “철이”라 지어주셨다.
이 덕분인지 몰라도 셋째 아들로 태어나 본의 아니게 책임 무거운 맏아들의 삶을 살아야 했던 나의 형님은 성장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인사사고와 병고에 시달릴 위기도 맞았으나 그때마다 그야말로 “차돌”처럼 야무지게 일어서곤 했으며 우람한 몸집을 대변하듯 먹성이 좋기로 유년 시절 생활했던 부산, 연산2동 내에서 소문이 자자했었다. 유년 시절 형님의 먹성을 두고 모친은 “하이고 이놈아! 위장이 넷이나 달린 소를 키웠으면 키웠지 너는 키우지 못할 것 같다.”라는 농담을 번번이 하실 정도였고 남의 물건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하여도 결코, 탐을 내면 안 된다는 뜻으로 “밖에 나가 놀다 집에 들어올 땐 남의 것이라면 먼지라도 털고 오라”시던 모친의 못 딱지 교훈 때문인지 몰라도 형님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 석가모니에 못지않게 유순했으며 어질고 착했었다. 형님이 자기 것 하나 아까운 줄 모르고 퍼주었던 탓에 “퍼주는 것도 정도껏 해라, 넌 입은 의복도 누가 벗어달라고 하면 한순간 주저 없이 벗어주고 알몸으로 돌아올 놈이로구나.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갈꼬”라며 양친의 걱정이 적지 않을 정도로 순하셨다. 반면에 “철이”라는 이름을 지닌 나는 형님과 달리 체격은 왜소했으나 양친께서 유아기부터 몸에 좋다는 갖은 보양식 다 해먹이며 극진히 보살펴주셨던 덕분에 혹한이 극성을 부리는 겨울에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억력 좋기로 온 동네 소문이 자자하였다. 개인의 일은 물론 대다수의 동네에 관해 사소한 일들까지 기억했던 터라 동네 아주머니들께서 내게 “사통팔달”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고 “모르는 것 있으면 철이에게 물어봐라”라는 “우스개”까지 등장했을 정도였다. 아울러 덧없이 흘러간 세월을 되불러 물어보면 세월은 내가 욕심도 많았고 남에게 뒤지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다고 알려준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 자신이 중증장애인으로서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아가야 할 운명을 예측이라도 하지 않았나 싶지만 “좀 더 나누며 살았어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반문과 함께 내 인생 언저리에 머물다 간 세월에 민망함과 황송함을 전한다.
유별난 우리 형제의 이름 사이에 적지 않은 일화가 종종 발생하곤 했었다. 1959년 추석날 한반도를 강타하여 당시 국내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겼던 태풍 사라가 우리나라에 상륙하기 전날부터 많은 양의 비와 강력한 바람을 동반했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형님은 그 시절 부산, 연산동엔 초등학교뿐 아니라 교육기관이 한 곳도 없었던 터라 매일 걸어서 양정초등학교까지 등하교하곤 했었는데 태풍 사라가 상륙하기 전날 앞서 상륙한 작달비와 갑작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학교장은 조기 하교를 결정하였으며 형님은 평소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던 단짝 친구와 양정동에서 연산동을 향해 종종걸음을 걸었다. 아침에 준비해 간 허름한 비닐우산으로 강한 비바람을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는데 매우 다급한 상황에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단짝 친구는 순박하지만 개구쟁이 기질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심의 시기였던지라 순간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했던지 고개를 숙여 무엇인가를 줍는가 싶더니 “차돌아!”하고 형님을 부르니 형님은 무심결에 “왜?”라고 대답하니 형님의 단짝 친구 손안에 움켜쥔 물건 한번 내려다보며 “누가 너 불렀냐, 얘 불렀지.”라며 길 가다 주운 차돌을 내려다보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형님을 놀렸다. 형님이 언짢아 죄 없는 길섶의 석돌만 걷어찼는데 한 번도 아니고 이러한 행위가 서너 번 반복되니 아무리 부처 반 토막 같은 성품을 지닌 형님이라 하여도 참을 수 없었던지 우람했던 형님의 체구 2/3밖에 되지 않은 단짝 친구를 돌풍이 뒤범벅되어 비 내리는 길바닥에 메다꽂아 눕혀놓고 복날 개 패듯 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채 서러워 양정동에서 연산동까지 울며 귀가한 아들에게 연유를 물어본 단짝 친구의 어머니는 “그 어질고 순한 차돌이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겠냐? 그 덩치, 그 힘에 이만하기 천만다행이지. 당장 가서 사과하자.”라며 흙탕물에 진창이 되어버린 옷도 갈아입히지 않고 선걸음에 아들을 앞장세워 사과의 종종걸음을 치셨다.
내 이름 석 자를 두고 “강철이 되데, 불의에 쉬 식는 강철이 아니라 언제나 정의에 식지 않는 강철”이 되어야 하며 만물의 이치에 통달한 성철(聖哲)이 되라시던 평소 부친의 가르침과 당부의 말씀이 유아기 시절부터 귀 고막의 딱지로 겹겹이 앉아있던 터라 나 자신마저도 한순간 헛된 행동을 하면 세상이 통째 뒤집힐 만큼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그 시절 부산, 연산2동 철도관사 57채 114가구 중 단 한 가구도 대문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집안 사생활을 가려 보호해줄 담장도 설치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옆집 간에 현관문과 창문만 열어도 이웃 간의 소소한 대화가 가능했었다. 요사이 같으면 어림 반품 어치도 없을 이웃사촌 사이 사람 본연의 향기인 정(情)이 수시로 오고 갔었다. 그 시절 우리 집(16호 2)이 57채 중 맨 끝 집이었는데 그즈음 경상북도 의성에서 타향에 삶터를 잡고자 우리 집 옆의 대지를 사서 집을 지었고 유순한 성품의 우씨 아저씨와 내 부친이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지내던 어느 날 내 나이 일곱 살 때 발생했던 작은 사건인데 우리 집 현관문만 열어놓으면 그 집 대청마루는 물론 네 칸의 방을 두루 살필 수 있었던 터라 저녁나절 이 집 안주인이 시장엘 가며 “철아! 아지매 시장에 갔다 오면 맛있는 거 사다 줄게. 우리 집 좀 봐 도고.” “예!” 문을 잠그지 않고 살던 시절이라 무슨 사달이 나더라도 내게 돌아올 책임은 없었겠지만, 내 입으로 철석같이 대답한 죄로 오후 식곤증 탓에 두 눈꺼풀이 서로 부둥켜안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갖 용을 다 쓸 때 깜빡 졸다 눈을 뜨니 아뿔싸! 이게 뭔 일? 한 검은 인기척이 그 집 마루 위로 살금살금 기듯 오르더니 안방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때마침 가족들이 죄다 마실 가고 혼자 혼비백산하여 어린 나이에 두렵고 무서워 차라리 문이란 문은 죄다 닫아버리고 못 본 체할까도 생각했지만, “철아! 비겁하게 불의를 보고 눈감지 말라 했지? 넌, 철이니까”라는 부친의 음성이 귓전에 쟁쟁하였다. “우리 아부지는 와 내 이름을 철이라고 지어가 이래 겁나게 하노.”라며 혼자 구시렁구시렁 댔지만, 호랑이 부친의 성난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죽을 각오를 하고 실눈을 뜬 채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추적하니 며칠 전 부산 4부두 이주민이 그 집 옆으로 이주해 왔었는데 검은 그림자의 주인공은 바로 그 이주민 큰아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장에서 돌아온 우씨댁 아주머니 시집올 때 받았던 혼수품이 함째 사라졌다는 것, 그 시절 우리 집에 비교적 멋스러운 해바라기 시계가 있었는데, 요 당찬 놈이, 그 당시 시간은 정확히 볼 줄 몰라도 숫자를 일에서 백까지 헤아릴 수 있는 능력과 시계의 긴 바늘, 짧은바늘의 역할은 분명히 알고 있었으므로 검은 그림자가 우씨댁으로 들어갔던 시간, 나왔던 시간을 꼼꼼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대질 끝에 일곱 살 어린아이의 당찬 기억과 언변에 기가 넘은 검은 그림자의 주인공은 자신의 죄를 죄다 실토했다는 것, 이후 부모님은 “우리 아들, 꼴값 이름값 톡톡히 해냈구나.” 하시며 무척 뿌듯해하셨다. 온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집 비울 일만 생기면 내게 달려와 부탁하곤 했었다. 그날 꼴값, 이름값 야무지게 했던 대가로 우씨댁 아주머니께 왕사탕 한 개 얻어먹었지만, 내가 평생 먹어본 그 어떤 사탕보다 달고 맛있었다.
“철이”라는 이름을 지닌 나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세상 그 어떤 시련과 풍파가 성치 못한 육신을 통째 흔들어 놓아도 영혼만은 “강철”처럼 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무의식중의 생활습관 덕분에 세상 그 누가 됐든 지기를 싫어했고 양보란 단어를 몰랐다. 그 유별난 성격 탓에, 지금까지 살면서 숱한 불의와 많이도 부딪쳤고 어느 시절엔 “정의의 사도”라 불리기도 했지만, 이런들 저런들 죄다 무슨 소용인가, 반생애 동고동락했던 내 청춘(靑春)은 황혼에 접어들어 바스러진 낙화(落花) 신세지만 내 이름 석 자는 여태 자라지 못한 철부지 코흘리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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