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묵상글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한 특별한 체험담 4부작 제4부 주님과 나만의 대화법

松竹/김철이 2020. 10. 26. 02:30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한 특별한 체험담 4부작 제4부 주님과 나만의 대화법

 

                                                                                                    김철이 비안네

 

 

 가끔 전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들은 시각적으로 볼 수도 언어적으로 직접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삼위 하느님과 어떤 방식으로 대화를 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성경을 묵상해도 이천 년 전 예수님도 하느님 아버지와 맞대면하여 주고받은 대화를 나누셨다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없질 않은가, 나는 비록 꿈속이었지만, 예수 성심을 뵌 적도 있고 기도에 빠진 채 비몽사몽간에 성모 성심의 음성도 들은 바 있으며 가정 제대 보에 내린 영적 표징도 접했지만, 우리가 삼위 하느님과 대화의 장을 열려면 우리 모든 기도는 기도의 중재자이신 성모님을 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최소한의 잠자는 시간만 재외 하곤 주님과 나만의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묵주 알이 때가 묻어 색이 변하고 묵주 줄이 터실터실하게 낡을 정도로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결과 삼위 하느님은 내가 봉헌했던 청원은 단 한 가지도 외면하시지 않았고 성모 마리아님은 내가 간구했던 기도를 하나 빠짐없이 받으셔서 함께 빌어주셨다. 그 덕분에 수많은 육 적 은총을 받아 누렸고 삼위 하느님께 향한 나의 믿음과 신뢰는 한층 더 굳건해졌고 삼위 하느님께선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의 방식으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내가 3년 동안 봉성체를 하던 중에 주님과 나 사이에 가고 왔던 대화의 내용이다. 전국 어느 교구의 사정은 마찬가지겠지만, 30여 년 전만 하여도 중증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본당이 드문 것이 우리나라 성당의 실정이었다. 신앙생활에 굶주린 몇몇 중증 장애인이 의기투합하여 중증 장애인들도 매주가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교우들 눈치 보지 않고 미사 봉헌할 수 있게 하자는 뜻으로 부산 가톨릭 지체장애인 선교회(현 부산 가톨릭 지체장애인 복지회)를 설립했었는데 회원의 90%가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외출 자체가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들이라 차량 봉사는 물론 많은 인력 봉사자가 필요로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부족한 봉사자 탓에 한 사람의 봉사자가 한두 명의 장애인을 책임지고 봉사하는 건 예사였고 1년에 한 번 성지순례를 갈 양이면 남성 봉사자 부족으로 50kg 체중의 여성 봉사자가 체중이 80kg가 넘는 건장한 남성 장애인을 턱이 높은 관광버스에 업어 올려야 할 정도로 열약한 실정이었다.

 

 나 역시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서 봉사자들을 도울 길은 기도밖에 없었다.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는 봉헌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어 하다 1994년 성탄을 맞아 그들에게 작은 고마움을 표할 목적으로 5단 묵주 20개를 사서 내 마음을 전할까 했으나 지녔던 돈은 단돈 3만 원, 1994년 12월 22일 12시 3분경 오전 기도 후 삼종기도를 바친 다음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 20만 원만 주세요.” 하고는 점심밥을 먹으려고 안방으로 향하는데 어머니께서 내게 “비안네 야! 내일 오후에 보좌신부님 오신단다.” 하셨다. 다음날 오후 보좌신부님과 수녀님이 오셔서 용돈 하라며 노란 봉투 하나를 꺼내놓으셨다. 전날 내가 주님께 드렸던 말씀이 떠올라 “신부님! 혹시 이 돈, 20만 원 아닙니까?”라고 여쭈었더니 신부님과 수녀님이 화들짝 놀라시며 “아니, 그걸 비안네 형제님이 어떻게 아세요?” 내가 어리둥절하신 신부님과 수녀님을 바라보며 “제가 어제 주님께 20만 원만 주십사 했거든요.” 그 후 그 신부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도인”이란 과찬으로 놀리시곤 하셨다.

 

 1999년 12월 중순의 어느 날 오후 기도 중 잠시 쉬는 시간에 전날 저녁 TV를 통해 접했던 열약한 국내 장애인 생활 시설의 실정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떠올라 “나 역시 중증의 장애를 지녔으니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들과 같은 처지로 살았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어 “하느님 아버지! 이 죄인도 그들을 위해 당신 영광을 드러내는데 먼지만 한 도구가 될 수 있다면 당신 영광의 도구로 써주소서” 했더니 며칠 후 나와 친분이 있는 타 본당 자매님 한 분이 안동교구 내에서 장애인 생활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데 무척 버거워한다는 형제님 한 분을 데려왔고 그 형제님이 자기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나더러 안동교구로 올라와서 자신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혼자 말로 “참 우리 아버지 귀도 밝으셔”라고 하고는 아무런 계산 없이 “주님께서 부르시고 내가 도움이 된다면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말을 본가에 남긴 채 그 형제를 따라나섰고 식은 밥 한 공기로 열한 명의 시설 가족이 나누어 먹을 정도로 열약했던 시설의 살림살이를 2년여 동안 황무지에 전신을 던지다시피 하여 최소한 시설 내 생활하는 가족들이 굶주리는 사단만은 없게 해 놓은 어느 날 아침 배달된 가톨릭 신문 광고란의 “떠나라!”라는 세 단어가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귀향한 바 있다.

 

 결혼 초기 무명의 문학도 생활에서 벗어나 문단에 정식 등단하게 되면 첫 수익은 모두 주님께 드리리라. 아내와 약속했었고 마침내 2007년 초, 한국 문단에 내 이름 석 자를 올리게 되었으며 등단 기념으로 자선 시화전을 개최키로 하고 장소 문제로 본당 주임신부님께 상의드리니 감사하게도 본당 강당을 시화전 장소로 사용하라는 신부님의 허락으로 2008년 1월 11~14일까지 4일간 자선 시화전이 개최되었다. 시화전 개최일을 며칠 앞두고 걱정이 되어 “주님! 이 죄인이 당신께 많이 드릴 수 있게 나흘간 함께 해 주소서” 했더니 부산 평화방송이 시화전 홍보를 맡게 해 주셨고 일반인을 비롯해서 많은 교우와 문인들이 시화전을 관람케 해 주셨던 끝에 100점을 출품했던 시화가 거의 다 판매되었고 판매 수익금 전액을 본당 외방 선교 후원회에 봉헌한 바 있다.

 

 이 몇 가지 체험을 묵상해볼 때, 삼위 하느님께선 24시간 우리와 늘 동행하심과 우리의 사소한 말 한마디까지 다 듣고 계신다는 것이고 사심 없이 가난한 타인을 위해 사용하려 하는 용도의 청원 기도는 즉시 들어주신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잎과 꽃이 줄기에서 떨어지면 시들어 말라죽듯이 우리의 영혼도 묵주에서 멀어지면 금세 말라비틀어져 시들시들해질 것이니 하느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는 우리는 묵주를 하느님 말씀을 전해 들을 수 있는 동아줄로 삼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