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묵상글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한 특별한 체험담 4부작 제2부 꼴찌가 일등 된댔지

松竹/김철이 2020. 10. 12. 01:48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한 특별한 체험담 4부작 제2부 꼴찌가 일등 된댔지

 

                                                                                                 김철이 비안네

 

 

 우리나라 일의 순서를 무시하고 급하게 서두를 때 빗대어 쓰는 교훈으로 “우물에 가 숭늉 찾는다”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마치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탄생한 꾸지람 같다. 그동안 숱한 세월을 두고 하느님의 창조물인 사람을 시켜 애타도록 부르셨고 성모님은 이 죄 많은 영혼을 위해 무릎이 까이고 피멍이 들도록 빌고 또 빌어 오셨다는 것도 모른 채 세속 놀음에 푹 빠져 살아놓고 삼위 하느님 친히 모습을 드러내시어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감히 상상이 불가능한 기적을 보여주시니 그제야 똥줄이 탄 듯 기도에 목을 매는 나의 모습이 가증스럽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성모 어머님이 이 죄 많은 아들을 위해 밤낮으로 꿇은 무릎이 터져 피가 흐르도록 빌며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신앙생활 3년 차에 들 무렵 혼자 묵상을 깊게 하며 네 시간째 묵주기도에 침체되어 있을 때 눈앞에 성모님이 성자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의 환시와 “너희가 왜 나를 이렇게 무릎을 꿇게 하느냐”라는 음성이 내가 기도를 바치던 가정 제대 위에 울려 퍼진 바 있다. 이는 유독 나 개인만을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다는 느낌이었다.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에 회개하지 못하는 세상 모든 죄인을 통칭(統稱)하여 자애로우신 성모 성심을 드러내신 것 같았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우리 신앙인들의 사랑에 심한 갈증을 느껴 “아, 목마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갈증에는 감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 세례 후 꼬박 3년을 한 달에 한 번 병자 봉성체(奉聖體)로 영성체(領聖體)를 해야만 했던 나는 주일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영하는 데 있어 심한 갈증을 느꼈다.

 

 주일날 가족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는 한편 매주 주일미사에 자기 의지대로 참례하는 주변 장애인 교우들이 최대의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겼던 나는 교리 때 익혔던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만 하면 그릇된 용도가 아닌 한 다 주신다는 내용이 떠올라 1997년 사순 기간을 앞두고 세속적 시각으로는 무모하고 겁 없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매주 주일미사 참례를 기도의 지향으로 40일 금식기도에 돌입했던 것이 바로 그 무모한 결심이었는데 이 40일 금식기도를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았다. 먼저 우리 부모님 입장에선 걱정을 뛰어넘어 분노를 치밀게 하였다. 부친은 나를 취급하기를 맹목적으로 신앙생활을 도를 넘겨 이성을 잃을 정도로 지나치게 종교를 믿는 사람 취급했고 모친은 그저 안쓰러워 40일 금식기도 중 내내 눈물로 함께 기도해 주셨다.

 

 하루에 물 한 컵을 식사량으로 정한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뜻에서 찬물로 머리를 감은 후 충분하게 묵상을 한 뒤 새벽 5시부터 기도에 들어가면 저녁기도를 재외하고 오후 6시 삼종기도 후 하루 모든 기도의 일정을 마무리하곤 했는데 육신이 성한 사람들이야 머리 감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간신이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부친이 목욕탕 바닥 가까이 나지막이 설치해 주신 수도꼭지에 머리를 갔다 대고 해동하지 않은 날씨에 찬물에 머리를 감기란 몹시도 벅찬 일이었다.

 

 부모님께 용돈을 타 쓰던 내 처지에서 한 끼니에 얼마씩 적당한 금액을 정해놓고 40일 동안 일정하게 모아가며 금식기도에 임했었다. 훗날 40일간 모은 사순 헌금은 당시 본당 원장 수녀님이셨던 비안네 수녀님을 통해 당시 중공을 앞두고 있던 장애인 생활 시설인 김해 우리들의 집에 벽돌 몇 장 쌓은 바 있는데 묵주기도 은총의 끝은 없었다. 힘든 금식기도를 할수록 울상은 하지 말며 오히려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머리에 기름을 발라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이루려고 하느님의 피조물 사람들을 시켜 나를 이끄셨는지 몰라도 나와 의형제를 맺은 형님이 오셔서 집에서 혼자 굶으며 기도하면 쉽게 지칠 수 있으니 자신들에게도 작은 선행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며 나더러 본인의 집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때마침 그 형님이 교적을 두고 있던 사직성당에서는 열흘간의 일정으로 성령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나와 그 형님 내외분은 세미나 신청을 했다. 금식기도 도중에 성령 세미나를 받으니 은총이 비 오듯 내리겠다는 과찬의 말도 잠시, 그 형님의 자택이 2층 주택이라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았던 그 형님이 열흘간 매일 몇 말들이 독 같은 나를 업고 아래위층을 오르내리는 일이 등에 업은 이도 등에 업힌 이도 무척 힘겨웠다.

 

 천신만고 끝에 성령 세미나를 마치고 우리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막바지 사순시기 금식기도에 열과 성을 쏟았다. 갖은 유혹 다 물리치고 금식기도를 무사히 마친 후 사순절(四旬節)을 맞으니 몸도 마음도 뛸 듯이 기뻤다. 더욱 기쁜 건 주일미사 참례를 지향으로 바쳤던 하찮은 내 기도를 들어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셨다는 것이다. 1997년 사순절 아침, 미사참례 준비를 하며 아침 식사를 하는 가족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무렵, 대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싶더니 “비안네! 성당 가자.”라는 음성이 들려 내다보니 당시 본당 봉사부 부장과 차장직을 맡고 계시던 형제님들이었다.

 

 그 후, 본당 주임 신부님께서 내게는 본당 레지오 차원에서 주일미사만큼은 빠짐없이 참례할 수 있도록 인력봉사 차량봉사를 하라는 특명이 떨어졌고 나의 희생적인 기도가 성모 성심과 예수 성심을 움직였던지 현재까지 주일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인데, 기도란 모름지기 헛됨이 없다는 믿음과 꼴찌가 일등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고 누수가 심해 늘 습기를 머금은 작은 방에서 자나 깨나 온종일 혼자 천상을 향해 쉴 새 없이 해대는 나의 기도 옹알이에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성심을 열어주신 은총 덕분에 지금, 이 순간도 거룩하신 삼위 하느님을 영적 아버지로 티 한 점 없으신 성모님을 영적 어머니로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