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묵상글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한 특별한 체험담 4부작 제1부 영적 부활

松竹/김철이 2020. 10. 5. 01:00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한 특별한 체험담 4부작 제1부 영적 부활

 

                                                                                  김철이 비안네

 

 

 인간사 모든 삶은 단 하나의 동체(同體)처럼 필 때가 있으면 시들 때가 있다. 사람들이 생사고락(生死苦樂)을 이어가는 동안 세상 사람들이 반복해서 태어나고 죽어가듯 자유의지대로 지닐 법한 신앙생활도 때가 돼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본인이 간절히 원하고 그토록 하고 싶어 해도 주변의 갖은 방해꾼, 유혹 꾼들 탓에 애가 타도록 하고 싶어 하던 신앙생활에 관해 입 밖에도 내지 못하고 주변의 눈치만 살피던 중 그동안 본인의 신앙생활에 걸림돌 역할을 하던 이가 명을 다해 세상을 떠났거나 가정 형편상 떨어져 생활해야 할 처지의 틈을 타서 세상 모든 삶의 주관자(主管者)이신 삼위 하느님의 성전을 찾아 대성통곡을 하며 평생 주님을 뒷전으로 미뤄놓고 잘못 살아온 삶에 대한 회안을 토하는데 겉으로 보기엔 머리엔 이미 서리가 내려 유신은 호호 할머니, 파파 할아버지의 표정이었고 수십 년 허덕이며 살아낸 삶의 무게에 눌려 허리는 ㄱ자로 굽어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믿는 살아계신 하느님께선 이들이 젊은 시절 허송세월하며 성전을 찾지 않았다고 그들에게 돌아갈 상급(賞給)을 절반으로 줄이실까,

 

 인간적인 생각으론 개개인이 신앙을 갖는 문제만큼은 사람의 자유의지(自由意志)대로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이 또한 창조주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위의 호호 할머니 파파 할아버지 경우에도 주님을 늦게 찾은 자책감에 시달렸겠지만, 이 땅의 그 어떤 문제도 천지의 창조주 허락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 역시 신앙을 지니기까지 순탄하지가 못했다. 당시엔 깨닫지 못하다 훗날 묵상 중에 깨달았던 점인데 내가 신앙을 지녔던 서른일곱 살 이전에도 주님은 몇 차례에 걸쳐 내게 손을 내미셨고 그 손길이 창조주 하느님의 부르심인 줄도 모른 채 갖은 핑계로 거룩하신 사랑의 손길을 뿌리친 것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 그 부르심이 창조주 하느님의 손길인 줄 알았다 한들 내 처지로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내가 몸이 성했더라면 부모님 몰래 교회를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우리 가문의 그 누구라도 십자가상을 우러러 주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위가 용납이 되지 않았고, 안창 마을 뒷산 암자 주지 스님께 한글을 깨우치신 나의 부친은 유년 시절 숙부님이 등 하교 시에 두 배 반이나 먼 암자 옆길을 두고 두 배 반이나 가까운 인근 교회 앞길을 택하는 날이면 그날은 아무리 세상에 단 하나뿐이고 귀한 동생이라 하여도 동생을 미친개 잡듯 했다고 하니 그 성품 앞에 감히 누가 교회를 거론하고 예수님을 입에 올리겠는가?

 

 이토록 엄하고 고루한 가문 풍속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님을 주님이라 고백하고 하느님을 나의 영적 아버지로 섬기게 되기까지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더할 나위 없이 크셨다는 것이다. 내 나이 열아홉 살 때 예수성심의 모습으로 죄 많은 내게 오라고 손을 내미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도 예수성심의 부르심인 것도 깨닫지 못한 채 긴가민가하여 그 후 이십여 년 동안 세속 똥통에 머무적거리는 내가 안타까우셨던지 성령님께서 친히 사람을 움직여 나를 삼위 하느님 기적의 현장으로 부르셨던 것이다. 내 부친의 사촌 누님, 내게는 종고모님이 구교 가문으로 출가하셨음에도 종고모님은 수십 년 동안 우리 가족들에게 복음 한 마디 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 나이 서른일곱 되든 해 종고모님의 시댁 조카딸이 내 모친께 전화를 걸어 나를 지칭하며 사형에게 예수님의 참사랑을 알게 해 주자고 하며 광주교구에 성령님과 성모님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 갖가지 병자들에게 치유기도를 해주는 70대 후반의 고현정 마리아라는 할머니가 계시는데 사형을 데려가 치유기도를 받게 해 주자는 것이었다.

 

 내 모친은 내 나이 열일곱 되든 해 말까지 내가 지닌 장애를 고치고자 여자의 몸으로 말 통 같은 아들놈을 업고서 전국 용하다는 병, 의원은 다 찾아다녔으며 부질없는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는 속담도 있듯이 평생 장애를 멍에처럼 안고 살아갈 아들이 안쓰러워 물불 가릴 겨를 없이 용하다는 무속인을 불러다 거액을 드려 큰 굿판까지 서슴지 않고 벌였던 터라 누굴 쉽사리 믿겠는가, 고모님의 시댁 조카딸이 모친을 설득하기를 “사장어른! 언 사십여 년 동안 숱하게 속아오신 줄 잘 알지만, 우리 예수님은 결코, 속이지 않으실 겁니다. 하니 마지막으로 한번 더 속는 셈 치고 사형을 데려가 보시지요?” 이렇게 하여 천신만고 끝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 이루어졌다. 1992년 당시 국내에는 중증의 장애인을 태워 장거리를 운행할 만한 대중교통 수단이 전무후무했었기에 우리 가정 형편에 거액인 50만 원을 들여 개인택시를 왕복 전세 내어 1박 2일의 치유기도회에 참석했었다.

 

 과연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엄청난 기적을 접할 수 있었다. 기도 한 마디에 말기 암 환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그런가 하면 희귀병 환자들이 치유의 기쁨을 대성통곡으로 대신하는가 하면 나보다 중증의 뇌병변 장애인이 휠체어에서 일어나 자기 두 발로 걷는 등 주님의 권능(權能)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했었다. 주님은 육신의 병을 치유받고자 했던 내게 영혼의 병을 완치시켜 주시며 영적 부활을 시켜주셨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쏟아부어주셨다. 기도가 뭔지도 모르는 내게 고현정 마리아님을 통해 피눈물 흘리신 성모님의 상본과 모자의 연을 맺어주셨고 기도의 뜻과 방식은 몰라도 어린아이가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고 매달려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1박 2일 기도회에 다녀온 나는 “거금 50만 원을 들여 먼 곳까지 갔다 왔으면 삐딱하게라도 걸을 줄 알았는데, 별수 없네.”라는 비꼼과 “저놈이 죽을라꼬 환장했는 갑다. 잠도 안 자고 청승을 떨고 있는 거 보머”라는 가족들의 구박을 귀 밖으로 흘려보내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묵주기도를 필두 핵심으로 삼아 갖가지 기도를 독학으로 익히며 매진했다. 4개월 뒤 가족 네 명과 함께 입교했었는데 당시 본당 원장 수녀님으로 계셨던 비안네 수녀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고 잠도 자지 않고 기도에 목을 매니 건강 해칠까 걱정이라는 모친의 말씀에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자가 이토록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기도에 매달리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다며 신앙도 좋고 기도도 좋지만 그러다 주님도 못 뵙고 죽겠으니 기도량을 줄이라는 것이었으며 그 말씀에 반발하여 “수녀님! 수도자 맞습니까? 어찌 수도자가 기도를 줄이란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했는데 이 말이 한동안 안락성당 주변을 유행어처럼 떠돌곤 했었다. 이 일을 두고 훗날 주님은 뭐라 하실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