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松竹/김철이 2020. 8. 29. 01:22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youtu.be/anVXz96SqYg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많은 성인들의 죽음이 그들의 축일이 되었듯 우리도 요한의 수난일에 성인을 기억하고 그 죽음의 가치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요한의 죽음은 여러 모로 신앙을 증거하다 죽었다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의 죽음은 사실 신앙을 증거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죽었던 수많은 예언자들의 죽음과는 조금은 다른 결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왕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지적했고 그를 미워한 헤로디아에 의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죽인 것은 그를 두려워하고 그의 가치를 인정했던 헤로데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실제 이유는 이 왕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왕의 약속"이라는 자존심이 걸린 권력과 권위가 요한의 목숨을 한 순간에 잃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해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헤로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요한의 말을 어기고 해서는 안되는 결혼을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요한을 아끼고 보호하려 했습니다. 요한은 죽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로디아의 음모가 들어가 있긴 했지만 그것이 요한의 직접적인 죽음의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 그리고 춤추는 소녀에게 한 그의 약속에 헤로데는 자신의 자리를 걸었습니다. 왕의 약속이니 물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자신이 가진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수 있다는 맹세가 헤로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헤로데는 요한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요한의 죽음에서 신앙보다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선을 아는 사람. 그리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도 자신을 위해서는 알면서도 죄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렇게 의로운 이, 예언자가 목숨을 잃습니다.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것도 자신 앞에서는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의 약함이 드러난 사건이 요한의 죽음에서 드러납니다. 

 

결국 정의보다 불의가 승리했고 정의는 늘 살아있고 모두가 알고 있으나 지켜지지 않는 상황은 지금도 반복됩니다. 요한의 죽음 이후 시작되는 예수님의 활동은 이런 정의가 어느 한 사람이 아닌 우리 모두가 지니고 지켜야 할 가치로 만들기 위해 우리 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누군가 같은 이유로 예언자들을 죽였던 시대를 끝내는 것은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정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 하나를 죽여서 없앨 수 없는 정의는 그렇게 우리 모두를 요한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