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松竹/김철이 2020. 8. 7. 02:30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youtu.be/jB1DTZ0aO3U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의 정신을 말해보라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사제로서 보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자신'이라는 단어로 여겨집니다. 

 

어릴 때 등장한 '개인주의'라는 말은 '이기주의'보다는 괜찮지만 부정적인 단어의 범주에 들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지만 지금 우리가 보여주는 개인주의는 같은 의미임에도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노력에 더 가까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의미는 다른 이에게는 '무관심'으로 그 피해 정도를 개의치 않는 형태로 바뀌어 있습니다. 

 

곧 '자신을 버리고'라는 표현이나 '심지어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이라는 예수님의 표현은 근본에서부터 막혀 버린 듯 느껴집니다. 선을 행하라고 말을 하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보다 더 효과적인 독려는 없습니다. 이게 다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내게 하는 비결이 됩니다. 

 

하느님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말하는 교회 안에서도 이 개인주의는 신앙의 기본으로 진화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개인적인 체험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견해는 아주 오래된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사람들이 마치 하느님을 믿기 전의 상태인 듯 사는 많은 이유는 자신을 확인시켜줄 하느님을 아직 못만났다는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 이 반대의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람들이 자신 안에 갇혀 하느님을 모르고 하느님을 이용할 지경에 이른 세상의 모습에 경고하고 당신 스스로 자신을 버리고 사랑하는 삶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셨지만 우리는 주님만 가능한 것으로 여기거나 주님을 한 껏 치장하며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방향으로 내용을 왜곡시킵니다. 

 

자신을 버리거나 잊어버리거나 심지어 미워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가치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자신을 버리고, 잊고, 미워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자신을 향한다면 사람은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덫에 물려 버립니다. 결코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행위가 심지어 선한 것조차 자신을 위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대상을 가치 없는 것으로 혹은 영향을 받은 수혜자로 잡아 두는 방향을 만듭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는 더욱 세워지고 높아지는 것을 행복이라 말합니다. 곧 하느님도 자신을 위해 '사랑하셔야 하는' 분이 되는 겁니다. 물론 은총이라 말하고 감사를 표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선사하는 질 좋고 최상의 도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어떻게 되느냐?'라고 묻고, '의미 없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사랑이란 자신이 잊혀지고 대상만 남을 때 이유도 의미도 드러납니다. 결국 돌아서 '자신'이 남는다면 우리는 정말 더욱 나빠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것은 '희생'이나 '사랑'이 아니라 '투자'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