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松竹/김철이 2020. 8. 5. 11:04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youtu.be/jUpIcHQIuDI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든 것에 앞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최소 단위의 무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가족, 친구, 연인, 그리고 넓게는 학교, 직장, 사회, 나라 등 같은 요소를 공유하는 생활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이 요소를 기준으로 서로 다른 그룹과 차이나는 삶을 살며 때로 그 차이를 차별의 이유로 만드는 일들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민족의 삶이 이루어졌던 곳에서 이스라엘 사람 예수님은 이방인이었던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사연을 마주하십니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한 어머니의 마음은 한결같겠지만 그럼에도 여기에 '이방인'이라는 한가지 요소가 끼어듭니다. 곧 우리와 같은 민족, 편, 가족, 나라, 피부, 인종, 성향, 입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닫힌 입이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길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에게 가졌던 마음처럼 오늘 예수님은 정말 이스라엘 사람처럼 행동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이 열린 것은 여인이 아니라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였습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인을 돌려보내길 권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야기에 화답하듯 말씀하십니다. 곧이어 이어지는 대화에서 좀 답답하고 너무한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일관되게 바뀌지 않는 이 여인, 아니 어머니의 모습은 결국 완고한 예수님의 태도를 멈추게 합니다. 딸을 위해 어떤 것도 넘어설 준비가 된 어머니는 심지어 수치스런 표현까지 안아 버립니다. 오직 딸을 살리기만 하면 된다는 이 어머니의 마음은 우리가 기준으로 세운 모든 벽을 일시에 허물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의 선택'의 경계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이 어머니는 유일한 것으로 아는 이 믿음으로 딸을 구해냅니다. 그녀가 하느님의 답을 받지 못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지만 하느님을 찾는 그 마음과 목소리 그리고 그 이유가 된 딸이 식탁에 놓여진 질서를 모두 넘어선 것입니다. 

 

사랑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내려 놓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또 다시 정신을 차려 자신을 찾다가 많은 다툼이 일어나고 분열도 생기지만 우리는 사랑 앞에서 허물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자존감, 자존심, 자신감 모든 자신을 무너뜨리는 사랑은 다른 경계도 무너뜨릴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듯 보이는 많은 경계는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모두 사라집니다. 우리 눈에 견고하게 보이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면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우리는 여전히 많은 담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허물기보다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유리함을 누리는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인인지, 종인지, 혹은 그 탁자 밑에서 조각을 기다리는 강아지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놓여진 빵은 누구에게나 생명의 가치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이의 믿음에 온전히 내려진 빵의 가치를 알아듣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이 빵을 떼서 나누시는 주님의 모습을 따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