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松竹/김철이 2020. 5. 8. 10:47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오직 예수라고 외치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고 새겨야 할 진리이며 그것으로 우리가 누리는 생명이 된다는 말씀이어서 이 말씀 안에 우리의 모든 삶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종교' 혹은 '신앙'이라는 제한적인 범위 속에 가두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곧 이 말씀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말씀 말고도 다른 기준들이 있다고 분리해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신앙이라는 일정한 범위 속에 진리이고, 길이며, 먼 훗날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것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그래서 성직자가 신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신앙은 성당의 범위나 혹은 활동 중 선행의 가치 안에서만 머무를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치열한 삶은 주님의 말씀과 관계 없이 승리하고 이기는 것이 축복인 듯 이야기하고 그것이 신앙의 혜택인 듯 설명할 때도 많습니다. 곧 세상의 길과 진리와 생명을 걷는 이에게 그가 성공하면 하느님의 축복을 선언하고 그가 실패하면 그것은 성공을 위한 시련으로 해석하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또한 그럴수록 성당에 와서 빌고 정성을 바치고 무엇인가 잘못이 있는 듯 반성하라고 다그치는 것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릴 아시는 듯 먼저 이야기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우리를 산란하게 하는 것은 우리 삶이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과 세상과 함께 할 때 생깁니다. 우리는 이 삶에서 유리한 세상의 길과 상식, 그리고 행복으로 불리는 가치들을 쫓으려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데도 우리는 자꾸만 그것에 기대거나 이용하려 합니다. 그것이 당장 나에게 유리하기 때문이고 많은 이들이 그런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진리는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도 또 개인의 이익에 무조건 합당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길을 따름이 우리에게 전해줄 손해와 불이익을 짐작하는 편이 빠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옳다해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럼에도 우리가 가야 할 길와 따라야 할 진리, 그리고 얻어야 할 참 생명이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보면 늘 그 끝에서 십자가를 만나고 주님의 말씀도 그런 고통의 삶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하는 가치는 주님의 삶은 그 하루를 제외하고 늘 사람들에게 행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십자가 앞에도 또 그 뒤에도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그 십자가를 이용하여 늘 위협하고 조롱하여 우리가 마치 고된 삶으로 보상을 꿈꾸는 이들처럼 만들지만 주님은 늘 행복하셨고 기쁘셨습니다. 그로 인해 다른 제자들도 행복했습니다. 


주님의 소생만으로 부활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꼐 사는 삶. 예수님처럼 사는 삶은 행복과 사랑이 가득한 삶입니다. 세상 기준에 부족한 삶이라도 부족한 권력과 힘, 명예라도 그것 때문에 하루 하루 힘겹고 고생하는 삶이 아니라 매일 감사하고 행복하고 기쁜 삶이 이루는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참으로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보이는 고통과 인내와 십자가의 길 이전과 이후를 넘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은 우리의 분리되지 않는 모든 삶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두 갈래의 길에서 산란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사랑하며 매 순간을 살아야 합니다. 꼭 그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