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강론 듣기 : https://youtu.be/0FoW59Db3Tk
모두가 아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이 현장에서 잡혀 끌려 왔습니다. 증인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고 그에게는 이미 처벌이 정해져 있습니다. 현실에서 구할 방법도 또 구할 이유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데려와 묻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 사람을 끌고 온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시험입니다. 눈 앞에서 죽음이 정해진 사람을 두고 피할수 있는지 아니면 마주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부정할 것인지를 정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자리에 돌을 쥐고 던지기 시작하면 쉽게 상황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죄인이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일 뿐 가르침과 별개라고 말해버리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보여주어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과 기준이란 2천년 후의 것이니 그 때 신경을 쓸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같은 편이 되면 그들 사이에서 듣게 되는 조롱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대로 달리 행동하십니다. 예상하지 못한 예수님의 행동이 그분의 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조급함과 답답함을 가져왔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거리를 만들어 내십니다. 가까워질 수 없는 차이를 나타내듯 말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돌은 얼마든지 있고 죄인이 자신의 운명에 체념한 채 있습니다. 목숨을 구해도 구차한 삶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제 사람들이 주저합니다. 예수님이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듯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대고 돌을 들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한 마디에 그 결정을 해야 합니다. '죄 없는 자'란 이야기입니다. 앞을 쳐다보면 모두가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 역시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화난 마음에 욕을 해도, 돌을 던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인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인정하게 됩니다. 곧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여 그녀의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심지어 돌을 던져야만 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도 그러지 못합니다.
이야기 속의 사람들이 이 여인을 용서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죄는 여인에게 그대로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행동을 확실히 설명하십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사람들은 그녀를 죄인으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짊어지고 되돌아갔습니다. 우리의 눈은 정확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볼 때 어떤 기준으로든 명확한판단을 내리곤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과 부족함을 도와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곧 하느님이 사람에게 '거들짝'을 만들어 주신 이유는 사람이 자신 스스로 자신의 결함을 온전하게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서로가 필요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불완전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은 타고 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 완전하고 싶고 아니라도 자신을 위하려 하는 시도를 우리는 계속합니다. 곧 우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 스스로를 위하고 그래서 다른 곳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계속 채움으로 가능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매달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부족함은 함께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 사람은 그렇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한 사람을 두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은 그 죽음으로 자신들의 무죄함을 얻으려 했습니다. 결함이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죄를 지은 이의 목숨이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난 이유는 모두가 자신들의 진짜 부족함을 보았기에 그 죄에 책임을 물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죄했던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의 용서는 그녀의 죄를 지운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함께 온전히 기억 속에 그녀의 죄를 또 사람들의 시선을 함께 가지고 떠나게 됩니다. 그녀의 고단한 인생이 보이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로 아직 그녀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복음 속 이야기는 이것으로 간단히 끝나버리지만 줄곧 우리는 이 여인의 불행한 인생으로 여러 이야기들을 지어내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쥔 이유 없는 분노와 돌멩이는 여전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울 수 없기에 우리는 계속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녀와 같은 사람들을 보내 주어야 합니다. 잊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에게 필요한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 그리고 삶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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