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松竹/김철이 2020. 3. 28. 00:29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강론 듣기 : https://youtu.be/eS-aeuzmkio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예수님. 생각보다 예수님이 계신 곳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생각들도 갈라지고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이미 노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이상하리만큼 정확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짐작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랐고 그분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분을 인정할 기준을 들이대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모든 것을 통해 예수님을 보려 애를 씁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의 첫 번째는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왔다는 것이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갈릴래아에 대한 편견을 이야기하기 전에 성경에는 베들레헴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만 아는 비밀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이민족의 땅에서 온 떠돌이 예언자 정도로 여겼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그 존재에 더 불쾌함을 느낀 것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붙잡을 생각으로 시도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성전의 경비병들이 되돌아와전해준 이야기가 그 모든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메시아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분이고 그래서 예언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신경쓸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경비병들의 이야기처럼 그분의 말과 행동은 달랐습니다.백성들이 따르는 이유는 그분이 메시아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말이 살아있는 권위가 있었고 하느님에 대해 새로 듣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하느님의 사람들과 이질감으로 드러났습니다. 백성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가르치는 이들이 보여준 하느님과 전혀 달랐던 예수님의 가르침은 틀렸다고 말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분이 안식일을 어긴다고는 하지만 하나같이 누군가를 도와주고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싫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를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그들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왜 예수님이 싫은지, 왜 없애버리려 하는지 말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들의 영향 아래 있어야 할 이들이 다른 곳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자신들을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차별성은 지식과 도덕성이었습니다. 같은 백성이지만 같을 수 없었던 이들은 백성들 사이에 있는 한 사람이 미웠고 싫었던 겁니다. 하느님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가 그랬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올라가신 이유는 다름아닌 그들의 이런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죄 없는 이가 죄인이 된 이유는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백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셈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도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사셨는가입니다. 백성이 그분께 모여든 것보다 그분이 백성들 안에 머무셨음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주 받은 듯 살고 있다고 백성을 대하는 이들은 아직도 많습니다. 그들은 지닌 지식과 힘과 권력을 통해 백성을 '위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심이라면 그들이 서 있는 위치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결국 가장 비참한 날 그 본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의 날, 그들은 멀리서 주님의 죽음을 조롱했을 겁니다.  그들의 자리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