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어느날 갑자기 그분은.../정호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松竹/김철이 2019. 11. 30. 20:42

어느날 갑자기 그분은...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많은 일들을 준비합니다. 준비한다는 것보다 준비하라고 요구받고 그에 따라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날 너무 커버린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면 도무지 우리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저 그 시간을 그렇게 바쁘게 보냈을 뿐 그 결과가 꼭 지금을 만들었다고 보기에도 우리에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받아주시기를 청하고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누구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 또 무엇을 잘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누구나 해야 하는 일들이 어느새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을 보았고, 그 일을 하는 이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겪었습니다. 처음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 또 주님이 하신 일을 하겠다고 길을 나섰으나 그분의 길에는 늘 그분만 계시고 곁을 지키는 이들은 순식간에 바뀌거나 순교자처럼 지냅니다.


안드레아와 그의 형 베드로. 수많은 이들이 모인 무리에 들지 않고 자신의 배에서 그물을 손질했던 형제는 그 배에 오르신 스승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들로 그들을 기억하지만 그들은 이 스승을 따라 길을 나선 이가 아니라 찾아오신 그분을 만나 그분이 가자는 길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 가장 소중한 스승인 열 두 제자의 모습이 우리에게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승이 원하시고 명하신 일을 해서입니다.


준비한 일을 하는 것은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필요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어서 만족이 아닌 기쁨과 행복을 선사합니다. 물론 그 몫은 일을 하는 이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통해 사랑하신 이의 몫입니다.

도구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잘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손잡이를 쥔 분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종. 그 단순한 순명이 참 많이 필요한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