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憐憫)
김철이
그이와 나는 본래 서로 이름 세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서로를 아끼며 염려해 주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가슴으로 애정도 우정도 아닌 연민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이를 처음 만났던 곳은 깊은 산 속 맑은 옹달샘 같은 신선한 향기가 쉼 없이 솟아나는 곳이었다. 내 나이 스물일곱 비교적 어린 나이에 문학도의 길을 걸었던 덕분에 작가로서 제법 연륜이 쌓여갈 무렵이었다. 하루는 장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를 만큼의 대작을 집필할 수 있는 소설가를 꿈꾸는 진식이라는 또래 친구 녀석이 찾아와 음주가 무를 제대로 즐길 줄 모르면 인생을 논할 수 없고 인생을 논하지 못하면 글 쓰는 작가로서 자질이 안 된다며 진정한 인생을 논할 수 있도록 몇 잔 의 술로 우리의 영혼 속에 여백을 만들어 놓자고 설레발이지는 통에 그 친구의 등에 업혀 조용한 음악이 잔잔한 강물처럼 흐르는 한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술집 안은 젊은 남녀들의 숱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택시에서 나를 다시금 둘러업은 친구 녀석은 한쪽 귀퉁이에 홀로 외롭게 놓여있던 긴 소파 위에 나를 팽개치듯 내려놓고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들숨 날숨 고르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 술집은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층을 상대하는 영업장임을 느낄 수 있었다. 카운트에서 냉수 한 컵을 얻어 마신 친구 녀석이 내가 앉아있던 소파로 돌아와 앉더니 뜬금없이 “너, 오늘 여자 친구 한 사람 소개해줄 테니 잘 해봐라.”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실없는 농담인 줄 알고 “또, 또, 주접떤다. 주접도 장소 봐가며 떨어라” “야! 넌, 사람 본심도 모르면서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죄다 주접으로 치부해 버리냐?” “사람 섭섭하게. 진지하게 얘기하면 진지하게 들을 줄도 알아라.” “야! 네가 진지함을 논하면 말라비틀어진 북어가 배꼽을 잡고 웃겠다.” 농담으로 받아들였는데 진식의 표정으로 보아 농담인 것 같지만 않았다. 나 혼자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진식이 녀석이 카운트 쪽을 향해 손짓하며 누구를 부르는 듯하자 카운트에 앉아있던 꽉 마른 체구의 여인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아주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드러나는 여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다고 느껴졌고 피부는 희다는 표현보다 무슨 중병을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여인은 드레스형의 긴 치마가 다리에 감기는 듯 앞으로 야무지게 모아 쥐며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누나! 누나가 오매불망 만나보고 싶어 하던 그 친구예요.” ”그래요? 반가워요. 난 숙희예요. 최숙희, 이름이 철이씨라고? 김철이? 그리고 유명하신 작가님이시라고요? 문학 작가?” “예!” ”올해 스물일곱?” “예!” “난, 서른여섯, 그럼 내가 누나네.” 여인은 우수에 찬 겉모습과는 달리 무척 활달한 성품을 지닌 듯하였다.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여인의 질문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마디 대답만 해놓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는 내게 여인의 질문은 멈출 줄 모르고 이어져갔다. “철이씨! 아니, 김 작가님!” “예!” “지금 현재 집필 중인 소설이 있나요?” “아뇨 보름 전에 한 작품 탈고하고 지금은 잠시 쉬는 중입니다.” “어머! 잘됐네.” “예?” “아!~ 다름이 아니라 김 작가님이 내 인생을 주제로 소설 한 편 써 주십사 해서요.” 갑작스러운 여인의 제안에 어리둥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내게 날아드는 여인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그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을 쓴다면 출판비용은 본인이 다 댈 테니 보태지도 빼지도 말고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그대로 한 권의 책으로 묶어달라는 것이었다.
그 후 여인을 주인공으로 “숙희”라는 소설집이 쓰이기 시작했고 36년 여인의 인생사를 듣기 위해 일주일에 두세 번은 만나야 했었는데 그때마다 들었던 여인의 36년간 인생사는 기구하다는 표현을 뛰어넘어 눈물겨워서 귀 기울여 쉽게 들을 수가 없어 둘이 붙들고 울기를 여러 차례, 여인이 태어난 안태고향은 경상남도 남해였다. 여인은 가난한 농사꾼의 슬하에 9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그 시절 가난한 농사꾼의 9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으니 삼시 세끼니 꽁보리밥이라도 배부르게 얻어먹는다는 건 셋 빨간 거짓말이었다. 여인은 다섯 살이 되던 해 하루 세끼니 골지 않고 밥이라도 얻어 먹이겠다는 아버지의 얄팍한 계산으로 진주에서 부자로 소문남 양 부잣집 수양딸로 가게 되었다. 그 후 2년여 동안은 양 부잣집 고명딸로 호의호식하며 남부럽지 않게 지냈으나 범인을 알 수 없는 방화사건으로 하루아침에 이승과 하직하게 되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숙희의 처지에도 청천벽력 같은 큰 변화가 생겼다. 양 부자가 세상을 떠나자 장성한 양부자 아들딸들이 부친의 유산문제에 걸림돌이 되어버린 숙희를 배척하여 본가로 돌려보내려 하니 숙희 부친 왈 2년 전 숙희를 데려갈 때 이미 그 집 자식으로 호적도 옮겨갔으니 본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고집을 꺾지 않자 숙희 부친의 친자 포기각서를 받아낸 양 부잣집 자식들은 울산에서 양계업을 하던 박씨네 잔심부름이나 시키라며 숙희를 보냈는데 처음 몇 달 동안은 슬하에 자식이 없던 박씨 내외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마음 편히 잘 지냈으나 돌림병으로 양계업이 철퇴를 맞자 박씨 내외는 복을 타지 못하고 태어난 숙희가 자기네 집에 들어와 재수가 없어 가세가 기울었다며 시시때때로 극심한 구박을 하기에 이르렀다. 먹기 싫은 음식은 먹을 수 있어도 보기 싫은 사람은 곁에 두고 보지 못하다는 속설도 있으나 한 지붕 아래 숙희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박씨 내외는 서울에 살던 먼 친척 집으로 보냈는데 그 집에서도 오래 살지 못하고 동대문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던 변씨네 식모로 들어갔다. 그때 숙희의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다. 말이 좋아 식모지 나이가 어려 집안일을 제대로 못 하니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가게의 잡다한 허드렛일을 해야만 했다. 사람 사는 공간은 다 비슷하니 변씨네 가게에서 생활하던 숙희의 삶은 고단하긴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고생 밭에 뒹굴기 시작했고 갖은 고생을 견디고 이겨내는데 이골이 난 숙희인지라 보리죽이라도 좋으니 죽을 만큼의 고생이 아니면 견디어내려 했으나 날강도질도 유분수지 50대 중반인 가게주인 변씨가 손자뻘 되는 아이의 육체를 넘보는 통에 가족들이 죄다 잠든 틈을 타서 생선가게를 탈출하기에 이르렀다. 변씨 가게에서 도망치듯 나온 숙희는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허기를 해결해볼 목적으로 무릎 꿇고 사정하여 들어간 곳이 일반 음식점이었다. 그때 숙희 나이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 소녀의 단순하고 순박한 생각이 깊은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인생을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떠밀어 넣은 아귀와 같은 역할을 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그 음식점에서 열아홉 살까지 숱한 고생 다 하다 열아홉 끝에 야간 업소에 나가던 또래 한 소녀의 꼬임에 넘어가 갖은 추태가 난무하는 술꾼들의 추태 섞인 시중을 들다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속담을 되새김질하며 10년 동안 허리띠 쪼아가며 독하게 돈을 모아 숙희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 그 당시 경영하던 술집 주인이 되었다는데 복 대신 고생을 타고 난 년이 술집 주인이 됐다 해서 그 고생이 어디 가겠느냐며 쓴웃음을 웃던 숙희의 하소연처럼 숙희의 타고 난 고생의 끝자락은 보이질 않았다.
암울한 시대는 권력을 손에 쥔 인간들이 매사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더니 그 후 1년여에 걸쳐 쓰인 “숙희”라는 장편 소설집을 탈고하여 출판에 이르렀으나 그 소설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숙희의 삶이 당시 정치권 고위층 어느 여인의 삶과 많이 닮았다 하여 시중 서점에 진열돼있던 책들은 물론 내가 썼던 본권의 원고마저 압수 소각되고 말았다. 민주주의 국가라 부르짖는 나라에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작태가 벌어져도 어느 한 곳 한 마디 호소할 곳이 없었다. 그 후 2년여에 걸쳐 숙희 누나와 나는 서로의 신세를 가련히 여기며 왕래하다 발전성 하나 엿보이지 않는 나라에선 더는 살지 못하겠다며 네덜란드에 이민을 가버렸고 그 뒤로 지금껏 소식을 전할 길이 묘연하다. 유난히 비 오는 날을 좋아했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하던 일손도 놓은 채 테라스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던 가련한 그 모습과 “숙희”라는 소설집의 내용이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간혹 레일 없는 추억의 열차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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