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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 아가씨

松竹/김철이 2015. 9. 9. 13:35

삼천포 아가씨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되어 대중들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해진 그 옛날 한 원로 가수가 오래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자신은 노래가 좋아 광대라고 만인이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봤던 가수의 길을 걸었고 평생을 그랬듯이 노래가 곁에 있어 노래를 부르며 살다 갈 것이라고… 노래가 인생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노래에 애착을 갖고 생활하셨고 그 옛날 딴따라라고 부르며 천대 시 했던 가수의 길을 걷고자 하셨던 부친 덕분에 필자 역시 태중 교육을 노래로부터 시작한 셈이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부친께서 본성적으로 노래를 좋아하기도 했겠으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편부슬하에서 생활하면서 가슴에 절로 쌓여가는 모정을 향한 그리움 탓에 노래를 한층 더 주변에 가까이 두고 생활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해본다. 물론 타고난 가창력과 노래에 향한 끼도 남다르게 많았겠지만,

 

 필자 역시 마찬가지로 세상과 첫대면을 하기 이전인 모친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한결같이 부친의 노래를 듣고 자라서 그런지 부친처럼 노래를 맛깔나게 잘 부르진 못하여도 노래를 무척 좋아하고 노래에 향한 끼 역시 남다르게 많은 편이다. 조상의 나쁜 악습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습성은 대물림을 받지 말아야 하지만 닮고 싶어 닮은 자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잘못 사는 부모를 닮기 싫어 애써 발버둥 치며 부모 슬하에서 벗어나려 도망을 쳐도 부처님 손바닥 안 결국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부모를 닮아 부모와 닮은꼴의 모습으로 사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 천륜이듯 나 역시 노래를 그다지도 좋아하고 애착을 갖은 근본적 이유가 부친의 가슴 곳곳에 쌓여 있던 그리움을 제대로 풀지 못해 대를 이어 내려온 한과 그리움의 대물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어떤 장르의 글을 집필하더라도 노래를 들으며 글 작업을 하는 습관이 있고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쓸 때면 잘 떠오르지 않던 내용도 마치 국수 빼는 기계에서 국수를 빼내듯 술술 잘 풀려나 아가는 희귀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습관이 있는데 오늘도 이 글을 집필하기 전에 노래를 들으며 글 작업을 하려고 글 작업에 걸맞은 노래를 검색하다 우연히 가슴에 꽂힌 노래가 [삼천포 아가씨]다. 물론 모든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들은 까닭도 있겠지만, 이 노래에 얽힌 슬픈 사연이 있어 쉬 잊히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내 나이 열 살 때부터 십 년 넘는 세월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성주라는 성함을 지녔고 성품이 늘 온화하고 조용했던 걸로 여태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계신 한 아저씨 댁 아래채에 세 들어 살았던 적이 있는데 이사한 다음 날부터 위채에서 수시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이 삼천포 아가씨였다. 그 당시 여니 집에선 전축(스테레오 오디오)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렵던 시절이라 노래를 밥 먹기보다 좋아했고 음악을 향한 천부적인 끼가 많았던 나로선 무엇보다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거의 날마다 아저씨 가족 중 누군가 (삼천포 아가씨)라는 곡목의 노래를 반복해서 몇 차례고 거듭해서 듣곤 하는 것이 아닌가 어린 철부지 귀에도 이상하게 들렸던지 모친께 여쭤봐도 고개만 절레절레 이 의문점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풀렸다. 아침나절 따뜻한 봄 날씨에 걸맞게 길가 쪽으로 난 창문 틈 속으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시선을 바깥으로 유혹했고 방문을 연 다음 손이 닿지 않는 탓에 먼지떨이를 거꾸로 들어 대나무 먼지떨이 막대로 길가로 나 있던 현관문을 밀어 열고 아무런 생각 없이 오가는 길손들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금세라도 넘어질 듯 건들거리며 한 청년이 연산동과 거제동을 잇는 개천 쪽에서 걸어오더니 필자가 앉아 있던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한눈에 봐도 필자와 같은 병명을 지닌 뇌성마비 장애우였다. 그 아저씨는 필자보다 스무 살 정도 나이를 더 먹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진일이라는 그 아저씨는 집주인 김성주 아저씨의 조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진일이 아저씨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삼촌인 성주 아저씨와 같은 집에서 동고동락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연을 듣고 나니 나이 어린 철부지 생각에도 가슴이 아파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그 기구하고 가슴 아픈 사연은 이러했다. 진일이 아저씨의 아버지께선 진일이 아저씨가 어머니의 배속에 잉태된 줄도 모른 채 병으로 세상을 뜨셨고 진일이 아저씨가 세상에 태어나자 젖도 몇 번 빨아보지 못했을 때 진일이 아저씨의 할머니께선 아저씨의 어머니 먼 훗날을 생각하여 손수 재혼자리를 찾아 보내고는 등에 업혀 있던 아저씨를 할머니께서 받아 키워오신 세월이 언 30여 년이라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신 심한 충격으로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뇌에 손상을 입었고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이미 뇌성마비 장애아로 태어났던 것이었다. 할머니 성화에 등 떠밀려 재혼하셨던 어머니 역시 몸도 성치 못한 아들자식을 두고 자신의 행복만 찾은 것 같아 항상 죄책감과 미안함에 가끔 재혼한 가족들 몰래 전 시댁을 찾을 때면 울다 울다 목이 쉬고 눈이 퉁퉁 부은 채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가슴에 그리움이 산처럼 쌓인 아저씨는 모정이 그리울 때면 어머니가 사시는 삼천포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삼천포 아가씨]를 거듭해서 몇 차례씩 듣곤 했었다.

 

 성주 아저씨께서 결혼 후에는 홀어머니와 부모 잃은 조카를 데리고 함께 생활했었는데 성주 아저씨가 당면한 현실에 눈이 밝았던 덕분에 장애우도 배워야 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며 1급 장애를 지녀 사지를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조카에게 다른 사람 몇 배의 돈과 공을 들여 라디오 수리 기술을 가르쳤고 얼핏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어머니 정을 못 잊는 조카를 보다못해 말단 초등학교 선생님의 박봉을 털어 전축을 사주었다는 것이었다. 진일이 아저씨가 청년기에도 재혼하신 어머니가 몇 차례 다녀가셨는데 그때마다 삼천포에서 큰 포목점을 경영하시는 덕에 아저씨에 관한 소지품은 죄다 최고급으로 사오시곤 했었다. 어머니께서 다녀가신 후엔 아저씬 일류 멋쟁이로 둔갑하곤 했었다. 아저씨의 어머니가 가장 안타까워하셨던 건 진일이 아저씨가 몸이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성했었다면 큰 상점을 경영함으로 재혼한 가족들 몰래 손님으로 가장하여 다녀간들 뉘라서 알겠느냐며 눈물을 쏟아내셨다는 것이다. 그 기구한 사연을 우리 어머니께 전해 들은 후론 진일이 아저씨와 나는 나이의 차이는 컸지만,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다정한 벗이 되었다. 그러나 모정을 향한 그리움은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었고 [삼천포 아가씨]라는 노래를 시도 때도 없이 늘 흥얼거렸다. 그 후 아저씨는 시시때때로 사무쳐 밀려드는 모정 향한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한 차례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구사일생 고마운 이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했지만 30여 년 전 성주 아저씨가 교사직을 퇴임하고 부산 연산동에 연산동 최초로 거북 다방과 거북 양 과를 개업할 무렵 다시금 행방불명이 되셨는데 아직도 누구 한 사람 진일이 아저씨의 생사를 아는 이가 없다고 한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삼천포 엄마는 만났을까 하는 궁금증과 한데 어울려 아저씨가 그다지도 애절하게 불러대던 [삼천포 아가씨]는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