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수필 5부작 세상 사는 이야기
- 제2화 사(死)의 찬미-
윤심덕[尹心悳] 그는 주어진 생을 다 못살고 세상을 떠났으나 자신이 원하던 삶을 살다 갔다는 말이 그를 향한 옳은 표현일 게다.
그는 우리나라의 여성 성악가(1897~1926). 호는 수선(水仙)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신여성의 대표주자로 일본 도쿄 음악 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돌아와 순회공연에 출연하여 성악가로 명성을 떨치고 토월회 등에서 배우로 활약하였다. 1925년에 대중 가수로 전향하여 <사의 찬미>로 인기를 끌었고, 일본에 레코드를 취입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연락선에서 애인 김우진과 함께 대한해협에 투신하여 정사(情死)하였다. 본디 사람의 삶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법, 그의 죽음을 놓고 의구심도 많았을 것이고 아쉬움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길은 외로운 길, 외롭지 않은 예술가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술가는 외로움을 애써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고독과 외로움의 투쟁 속에서 참예술 가의 끼를 발굴해 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세상엔 예술가의 끼를 평생 다 풀어낸 이들도 많겠지만, 주위 환경 탓에 타고난 예술가의 끼를 다 풀어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 무리 중에 나를 세상에 낳아주시고 오늘날, 한 예술가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예술의 끼를 물려주신 내 부모님도 분명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랬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소리꾼의 풀어내지 못함이 삶의 고단함으로 묻어나는 듯 쉰 막걸리 몇 잔에도 고 김정구 선생의 왕 서방 연서가 입술에 한 소절씩 묻어 흐르곤 하였다. 편부슬하에서 자랐던 외로운 유년시절의 그림자가 평소에도 일상 속에 절로 묻어났다. 그런 모습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무엇 하나 해드릴 수 없었던 자식의 마음도 아프긴 매 마찬가지, 아버지 심정이야 뉘라서 모르랴만 그래도 이미 흘러간 과거를 부여잡고 아파하는 그 모습이 못마땅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던 나의 자화상은 불효의 표본이라 하겠지. 그 옛날 동네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껌딱지처럼 따라다녔던 콩쿠르에서 1등 상의 단골 주인은 늘 아버지셨다. 한 번은 설날 콩쿠르에서 1등 부상으로 전축을 타오셨는데 철부지 어린아이의 소견에 얼마나 자랑을 하고 싶었던지 한동안 거의 날마다 개구쟁이 동네 친구들을 죄다. 집으로 불러들여 빙글빙글 돌아가는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목포의 눈물을 들었고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들었다. 그러한 노래들이 주는 의미와 뜻도 모르면서 덕분에 레코드 몇 장을 망가뜨려 젊은 시절 호랑이 같았던 아버지 호령에 쥐구멍을 찾았던 우화가 새롭게 한 걸음 다가선다. 헝클어진 실타래에 실을 고르려면 숱한 시간이 필요하듯 아버지의 풀어내지 못하셨던 소리꾼의 끼는 얼마큼 풀고 가셨을까…
어머니는 그랬다. 소녀 시절 꿈에서도 그리던 학의 화려한 춤마저 애써 접어버린 채 힘없는 모국의 역사에 쫓겨 가난한 봉급쟁이자 팔방미인(八方美人)이라 소문난 남편을 따라 부산 범일동 안창마을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으나, 수십 년을 안주인 없이 세 남자의 손에 의해 꾸려져 오던 살림살이란 보지 않아도 눈앞에 본 듯 선하지 않은가. 심지어 한국인의 필수 음식인 고추장 된장을 먹어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하시더란다. 갓 시집온 새색시는 저고리 고름을 풀고 잠시 쉴 시간조차 없이 너부러진 집 안팎을 쓸고 닦아 윤이 나게 해놓으니 안창마을 묶은 어른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이 자자했었단다. 할머니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셨고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이렇게 세 남자가 꾸려가는 보지 않아도, 돼지 움막과 같을 터이고 신지 않아도 10문 7이 아니겠는가? 적산가옥 한 지붕 아래 다섯 가구가 살았는데. 장맛도 제대로 못 보고 사시다 몇십 년 만에 며느리 손으로 담가진 장맛을 보신 할아버지 얼마나 흐뭇하고 좋았던지 갖은 장이 곰삭아 익어갈 무렵이면 숟가락을 들고 다니며 다섯 가구 장맛을 두루 보시고는 방에 들어와 하시는 말씀이 우리 장맛이 제일이며 껄껄 웃으셨단다. 한 집 시집살이도 하지 않으려고 요즘 여성들은 부모 있는 남자, 형제 있는 남자는 결혼상대로 최하위권에 둔다는 판국인데 어머니는 시집오자마자 두 시집을 살았단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는 본가는 물론, 어머니 시집올 적 내 오촌 당숙님의 나이 겨우 네 살이었고 아버지의 백부(伯父)님 내외의 슬하에 아홉 명의 자녀를 두셨는데 자라다 말고 갖가지 병으로 일곱 명이 요절하고 나니 장녀와 막내아들이 남았었단다. 그런데 장녀는 무사히 자라 혼인을 했지만, 막내아들이 행여라도 잘못될까 아버지께서 큰댁으로 양자로 가게 되어있어 어머니는 힘에 벅차게 두 시집을 살 수밖에 없었단다. 4남 1녀 중 고명딸로 자라며 고생이라곤 눈곱만큼도 몰랐던 어머니, 농사철만 되면 아버지 고향인 울산 호계리로 달려가 손이 물 마를 시간 없이 일해야만 했단다. 경주 시내에서 큰 양조장을 경영하셨던 외할아버지 슬하에 고명딸로 자라며 보리밥이라고는 시집온 후 큰할아버지댁에서 처음 대하니 도저히 넘어가지 않아 밥때만 되면 친정집 방향을 바라보며 애꿎은 행주치마에다 절로 흐르던 눈물을 몰래 받아냈단다. 농사 시절이 끝나고 본가로 돌아보면 집 안팎이 시집오기 전 그 모습과 흡사했단다. 적산가옥 단칸방에 홀시아버지와 혼전의 시동생과 함께 네 식구가 생활했지만, 끼니때마다 보리밥을 먹어야 하는 백부님 댁에 비하면 안창마을 판잣집은 천국으로 느껴졌단다. 그 시절엔 호강하며 살았던 사람 몇 없다지만, 흘러간 옛이야기로 들어봐도 어머니 고생이야 세상 어떤 여성의 고생에 비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 입 밖으로 고 이난영 선생의 어촌 낙조와 고 황금심 선생의 피리 불던 모녀기타가 절로 흘러나왔단다. 먼 훗날 우리 삼 남매를 앉혀놓고 고난으로 살아내신 젊은 시절을 해후하실 적에 어머니 유년시절의 꿈도 이난영 황금심을 닮은 여가수가 되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그랬던지 철도원 부부 동반 계 모임에서 간혹 어머니 부르시는 노래를 들을 시면 정말 간드러지게 잘 불렀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 어머니께선 그렇게 힘든 생활 속에서도 비관하지 않고 힘겨운 시름의 처지를 성화시켜 한세상 살게 해주신 하늘에 감사하며 사(死)의 찬미를 그 옛날 맑고 푸르렀던 안창마을 호계천 물 위에 몇 소절 노랫가락으로 흘려보내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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