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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으로 묻혀가는 한국의 모습들 (셋) 그리운 옛 동산

松竹/김철이 2013. 6. 19. 16:30

추억속으로 묻혀가는 한국의 모습들 (셋) 그리운 옛 동산

 

 우리나라 국민 가슴에는 타민족들보다 어머니에 향한 정과 고향을 향한 애잔한 그리움이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닌다. 이러한 삶에서 필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추억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이 본성은 개인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어릴 적 불우했던 가정환경 탓에 타인의 가정으로나 타국으로 외국에 입양된 내국인들은 어린 시절 자신의 처지를 숨기고 싶은 마음에서나 어려웠던 그 옛날 자기 신분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심정에서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이 태어난 모국을 잘 찾지 않지만 짓궂은 가정사 탓에 본의 아니게 국외로 입양되었던 아이들이 성인이 된 이후 자신이 태어난 모국의 정과 세상에 자신의 육신을 낳아주신 어머니의 정을 못 잊어 애써 모국을 찾는 우리나라 국외 입양아들의 본성을 미뤄 짐작해 보아도 우리 민족은 추억거리를 가슴에 쌓아두지 않는 다른 민족에 비해 많은 추억을 되씹어 먹으며 살아간다. 이 때문에 기뻤던 추억, 슬펐던 추억들 탓에 이미 흘러간 과거를 통째 부여안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와 흡사한 본성은 추억이란 전혀 없을듯싶은 짐승이나 하물며 추억은커녕 감정조차 없어 보이는 한낱 물고기들의 생태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음이다. 어린 연어가 봄에 부화한 지 몇 주일 후에 바다로 돌아가고 바다로 내려간 지 3~4년 만에 성숙하여 아래로 흐르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 모천(母川)으로 회귀하여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맞이하고 여우도 죽을 때면 머리를 제가 태어난 굴을 향하는데 이러한 모습들을 재현하는 것은 추억의 근원지를 찾아 움직이는 타고난 본성 때문일 게다.

 

 추억의 행선지를 찾아 떠나온 세 번째 이야기는 그 옛날 우리네 부모님, 그리고 우리네 가슴 어디엔가 헌디 딱지처럼 앉아 있을 몸소 생활했던 추억을 찾아 괴나리봇짐을 메어보자. 북녘땅에 고향을 둔 어르신들 기억 속엔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북청 물장수가 있다. 매일 새벽이면 물지게를 지고 집집이 물을 배달해 주던 그 물맛, 어르신들은 살아생전 다시금 그 물맛을 맛볼 수 있을는지… 물장수의 모습도 다양하여 강물을 뜨다 파는 북녘 물장수들과 달리 남역에서는 큰 드럼통에 수돗물을 가득 채워 주로 시장이나 상수도 접하기 하늘에 별 따기와 같았던 산동네 주민 가정에 손수레에 실어 날았다. 물장수 이야기가 나오니 추억 하나가 아련히 떠오른다. 가정마다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건강치 못했던 모친을 염려한 나머지 타고난 손재주로 양동이 두 개를 양 어깨에 걸어 메는 물지게를 만들어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시던 건장한 부친의 모습이 눈앞에 너털웃음으로 다가선다.

 

 “앗! 이런 웬 수박이지! 이젠 책가방까지 파랗게 물들여놓네!” 이런 실랑이를 7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중고등학교 교실에선 아침마다 쉽사리 접할 수 있었고 서툰 팬 실력으로 숙제하던 까까머리 신입생이 잘못 실수로 팬 대에 묻힌 잉크를 새하얀 노트에 떨어뜨리는 통에 애써 해놓은 숙제를 다시 해야 하는 난감한 사건을 어렵잖게 접할 수 있었다. 중학교를 막 들어간 형님이 난생처음 잡아보는 팬대 이니 팬 글씨가 서툰 건 당연지사 줄이 처진 노트에 글 쓰는 연습을 하느라 이마에 땀방울이 송얼송얼 맺히던 그 진지한 모습과 함께…

 

 아무리 흘러간 옛 추억이 그립다 하여도 철부지 어린 시절 접하기 달갑지 않은 추억도 있는 법인데 그중에 가장 앞서 떠오르는 것이 돗자리와 놋수저가 있다. 지금 이 시대의 현대기술로 짜내는 돗자리도 있지만, 내 어린 시절 재래식 돗자리는 제다 수작업으로 지어낸 것들이라 표면이 꺼칠꺼칠하고 매끄럽지 못해 노출이 심한 여름철 보드랍고 연약한 살결을 지닌 아이들은 돗자리에 에먼 상처를 입기 십상이었다. 나 역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어느 해 여름, 자칫 땀이 나면 몸에 붙는 이불을 깔고 자는 것보다 아무리 땀이 나더라도 살에 붙지 않고 까슬까슬한 돗자리 위에 자는 것이 훨씬 시원하고 기분도 좋다시던 어머니 꾐수에 넘어가 돗자리 위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웬걸!” 피부가 남달리 부드럽고 연약했던 탓에 거칠기 그지없던 돗자리 표면에 팔 꼼치와 등창에 피부 껍질이 까져 쓰리고 아파 온종일 칭얼대다 어머니께 뒈지게 맞고 한 대 더 맞았던 기억이 한 해 여름을 사는 내 영혼 속에 빙그레 웃는다. 또 하나 놋수저에 관한 달갑지 않은 기억인데, 황동(黃銅) 고유의 냄새 탓에 놋수저를 사용하던 어린 시절 끼니때마다 반찬투정이 아니라 수저투정을 심하게 하다 아버지 불호령에 혼쭐이 났던 기억과 두 살 터울 아래의 누이동생이 세 살 때 부모님을 따라 가문의 행사에 참석기 위해 아버지 고향인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구 호계동을 찾게 되었는데 혼례 잔치가 끝나고 잔치 음식을 나누어 먹을 때쯤 내성적이고 말 수가 적었던 누이동생이 울상이 된 채 수저도 들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물어보니 숟가락에 이상한 냄새가 나서 밥을 먹지 못하겠다던 당돌하고 야무진 말에 주위는 한바탕 폭소가 일었다. 어린아이가 밥상을 코앞에 놓고 밥을 먹지 못하니 보다 못한 할머니 한 분이 이웃 마을로 달려가 귀했던 은 숟가락을 빌려 와 밥을 먹게 했다는 웃지 못할 이 실화를 떠올리니 화려한 카펫이 급속도로 우리 생활공간을 음습해 오고 은수저보다 더 고급화 갖가지 디자인으로 고가로 팔려나가는 이 시대의 공간에서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필자의 영혼은 “그렇게 좋고 화려한 카펫 위에 자고 그다지 값비싼 수저로 밥을 떠먹으면 잠이 절로 오고 밥이 절로 넘어간다던?” 하고 나의 양심을 꼬집어 비튼다.

 

 하나! 둘! 셋!… 하나같이 장단을 맞추듯 적지 않은 소리로 힘차게 외치며 모두 몸을 움찔움찔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김일 선수가 상대편 나라 선수의 머리에 박치기 세례를 퍼부을 때면 흑백텔레비전 앞의 코흘리개 꼬마를 포함해서 동네 대머리 아저씨들과 행주치마를 설거지하다 말고 꼬깃꼬깃 움켜진 아줌마가 다 함께 입을 모아 박치기 횟수를 세 가며 요란스럽게 환호한다. 며칠이 지나도 김일 선수의 호쾌한 박치기 세례는 곳곳에서 화제가 되었다. 초등학교의 쉬는 시간엔 개구쟁이 사내아이들이 프로레슬링 선수들 흉내를 내며 교실바닥을 온통 레슬링 링으로 만들어 법석을 떠는가 하면 장래 김일 선수처럼 훌륭한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는 게 꿈이라며 교실 벽을 머리로 무차별 박아대던 통에 옆 교실까지 소란이 일곤 했다. 이처럼 60년대 초반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흑백텔레비전으로 프로레슬링 중계를 하는 날이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모든 생활여권이 편리한 시대에 사는 젊은 층에선 듣기 생소한 단어로 연탄이 있다. 요즈음처럼 기름이나 가스보일러로 따뜻한 겨울을 나는 이들은 떠올리기조차 귀찮은 존재가 연탄일 게다. 초겨울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면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연탄은 덜 가진 이들의 근심거리로 가슴 한가운데 시커멓게 묻어났다. 어렵사리 살았던 시절의 우리는 연탄 한 장이면 끼니를 해결하고 온 가족이 옹기종기 따뜻한 겨울밤을 지낼 수 있었다. 어린 시절별들이 꼬박꼬박 조는 한밤중에 자다 말고 바깥의 뒷간을 가려고 깊은 잠에 빠져 꿈길을 헤매는 부모님이나 형들을 깨워 동행했다던 어린 친구의 어젯밤 이야기와 함께 요강이 매일 밤 필수적인 존재로 위상을 높였던 시절이 있었다. 화장실이 실내에 있었던 가정이 드물었던 그 시절, 상류층이건 서민층이건 요강은 우리네 살림살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생활 도구여서 혼수로 놋요강과 놋대야는 시집가는 처녀와 함께 갔었다. 아무리 금지옥엽 귀한 자식이라 하여도 엇길을 걸을 때면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의 훈도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회초리가 인생 진로에 세상 제일의 스승이자 훈도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잘못을 저지르면 의당 어른들의 꾸중을 들어야 하고 회초리를 맞아야 한다던 그 옛날 순박하고 순수했던 동심은 어디로 사라졌는제 이 시대 아이들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어도 회초리를 맞겠다는 생각을 하기는커녕 작은 꾸중조차 들으려 하지않고 간혹 꾸중하는 스승이나 부모에게 대들기 일쑤고 더 나아가 폭행도 서슴지 않는 이 패륜의 시대를 살면서 나 자신에게도 패륜의 그 조짐이 보인다면 회초리 문화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가를 되새김질하며 추억 속 스승님께 회초리를 쳐주십사 청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