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옛 어른들께서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두 가지 단어가 살을 파고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생을 지배하는가 하면 피부 겉의 기생충처럼 붙어 매 순간 삶((살))을 파먹으며 생활하는 듯한 느낌을 절실하게 받는 요즈음이다. 그중 한 단어는 세월의 흐름이 너무 빨라 유수와 같다는 말이고 또, 한 단어는 세월의 흐름이 너무 늦어 지겨운 나머지 세월이 빨리 흘러가서 어서어서 늙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단어는 두 가지 계층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다. 그 한 가지 계층은 돈이 많거나 직위가 높아 일상생활이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즐거운데 세월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흘러가니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는 부유층이고 또, 한 가지 계층은 돈이 많지 않아 가난하거나 배움이 적거나 주위 환경 탓이 출세하지 못해 직위가 낮은 서민층이다.
위의 두 가지 단어를 분류한다면, 다 같이 한 번 왔다 한 번 가는 인생길에서 누구는 부모 잘 둔 덕에 어릴 적부터 호강하며 살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부모의 후광과 태어난 생활환경의 배경으로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리며 사는 덕분에 흘러가는 시간이 1분 1초가 아깝고 소중하여 시간은 금쪽과 같다는 표현을 쓰는가 하면 반대로 부모 잘못 만난 탓에 태어나자마자 고생을 세 끼니 밥 먹듯 하며 살다가 성장하여 요행히 결혼 배후자를 잘 만나 인생의 재도약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출세 한 번 못 해보고 돈도 한 번 마음 놓고 써보지 못하며 찌든 생활환경 속에서 무거운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각이 여삼추(一刻如三秋)라 하루라도 더 빨리 늙어 고생뿐인 세상사 살아있는 것이 감옥(監獄)이고 숨 쉬는 것이 형벌(刑罰)이라 표현했던 것일 게다.
세상이 변하고 시대도 변하듯 사람의 마음도 변하는 법, 때로는 시간의 흐름이 느려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요즈음 나의 일상생활에서 시간의 흐름은 빠르다는 표현을 뛰어넘어 총알과 같다. 이 말을 험난한 세상살이에 지쳐 살아있는 것이 감옥(監獄)이고 숨 쉬는 것이 형벌(刑罰)이라고 삶의 무게를 호소하는 이들이 듣는다면 행복하고 경상도 사투리로 호강에 겨운 소리 한다는 뜻의 포시랍은 소리한다고 하겠으나 결코 돈이 많아 즐거운 생활을 주체할 수 없어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느낀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시간에 감사하며 자신의 도리를 다하다 보면 하루의 시간이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으로 늘어난다 하여도 그리 지루하다고는 느끼지 않을 듯싶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인간사이라))) 기축년(己丑年) 한 해 동안도 수많은 사건 사고로 많은 사람이 영혼과 육신의 상처를 입어 겪어야 했고 사람과 사람 사이 수많은 실랑이도 오가는 동안 1년이란 소중한 시간이 아쉬움만 남겨놓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역사의 뒤안길로 훌쩍 떠나버린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기축년(己丑年) 한 해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해였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표현이 부족해서 표현이 어색해서 표현이 서툴러서 하는 독백도 들은 체 만 체 2009년 기축년(己丑年)은 떠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이른 아침 커텐을 제쳐버리듯 뒤로 젖쳐버리고 경인년(庚寅年) 새해가 밝아 왔다.
경인년(庚寅年) 첫날 아침 그날따라 지난밤 가는 해를 아쉬워하며 성당 자정 미사 후 많은 교우와 한데 어울려 술잔을 나누며 늦은 시간까지 보내느라 피곤하기도 하려마는 아침 이른 시간에 절로 눈이 뜨여 곁에 누워 세상 걱정 하나 없이 평온한 모습으로 자는 아내를 바라보다 바람처럼 스치는 마음에 아내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6년, 마음은 간절하나 가진 게 없이 아내에게 남들처럼 그 흔하디흔한 새해 해돋이 한번 못 시켜 주나 하는 생각으로 아내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과 지난 기축년(己丑年) 한 해 동안 좀 더 잘해줄 수 있었으나 순간 생각과 표현이 부족하여 아내의 마음을 서운케 해 주었던 후회가 교차하는 가운데 늘 한 곳에서 묵묵히 우리 가족에게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해 주는가 하면 동지섣달 북풍한설(北風寒雪)과 혹한(酷寒)을 막아주면서도 한 마디 내색도 하지 않구나 하며 천정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을 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었다. 아내가 잠결에 전화를 받으니 누이동생이 1박 2일 코스로 여행을 가자고 한다. 하룻밤 사이 내려앉은 눈곱도 채 떼지 못하고 부랴부랴 이부자리를 개고 대충 세수를 하고 나니 누이동생 부부가 들이닥쳤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갑자기 웬 여행이냐고 물으니 새해도 맞았고 해서 해맞이 겸해서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밥을 지어먹을 시간도 없어 중화요리를 대충 주문하여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고 누이동생 부부와 우리 부부가 남해를 목적지로 정하고 제매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올라 여행을 떠났다.
한가한 평일 때 같으면 두어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경남 남해의 길인데 양력설 연휴에다 주말까지 끼어 고속도로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새해 해돋이를 보고 돌아오는 차량과 연휴를 맞아 쉬러 가는 차량이 가다 서다 하는 통에 고속도로가 마치 주차장을 방불케 하였다. 자동차가 많이 정체되니 피곤하고 때로는 짜증도 나겠지만, 다른 가족이야 차동에 가만히 앉아 가니 신경이 덜 쓰였으나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운전대를 잡고 가족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제매에게 무척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네 시간여에 걸친 여정 끝에 남해 문턱에 들어서니 우리 가족 일행을 맞이해 주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의 고향인 시골 정취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마치 동화책에나 등장할 만한 아라비안나이트 궁전 지붕처럼 씌워진 지붕의 호텔이 우리 가족을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우리 일행이 하룻밤을 묶을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호텔에서 가까이 바라보이는 해변으로 나갔다. 해변 길을 따라 깔아놓은 빤질빤질한 차돌들이 흘러내리는 초저녁 달빛에 더욱 윤이 났다. 물밑까지 훤히 드려다 보이는 바닷물 속에서 방금 이라도 바다에서 생존하는 생명체들이 뛰쳐나올 뜻 물이 맑았다. 해변 한겨울 찬바람은 살점을 파고들다 넘쳐 뼛속까지 파고들었으나 티없이 맑고 상쾌한 바닷바람이 도심지에 지친 영혼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들어갔던 길을 되돌아 자연산 생선회로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로 들어가 가볍게 샤워를 한 뒤 호텔방에 누우니 큰 창밖으로 밤하늘이 눈 속에 들어왔다. 누군가 말했듯이 한순간이라도 방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천복을 다 받은 자라더니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이 나 역시 천복을 받은 자인가 하는 마음이었다. 장시간 자동차 여행을 하느라 피곤도 했겠지만, 아늑한 어머니 품속처럼 느껴지는 시골 정취 탓인지 평상시 같았으면 잠잘 생각조차 하지 못할 시간인데도 졸음이 쏟아져 눈이 절로 감겼다.
낯선 타향에서의 1박은 무척 평온한 밤이었다. 낯선 길손들을 받아들인 호텔방은 몇십 년 정이 든 공간과 같았다. 집에서 생활했을 때 같았으면 그 시간까지 등 대고 누워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잠자리에서 일어나도 벌써 일어나고도 넘었을 시간인데도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든 고향 같고 어머니 품속과 같은 시골 정취를 두고 생활터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에 더욱 눈뜨기가 싫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은 깨여 소곤소곤 속삭이는 가족들의 말소리 하나도 빠짐없이 귓전에 맴도는데 정작 눈은 뜨지 않으니 지난 1년 동안 숱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부닥치고 깎기며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삶의 짐이 쌓여 지쳐 있을 때 대자연 품속에 영혼에 진 짐을 내려놓고 쉬었던 덕도 분명히 있을 게다.
나는 본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으니 제쳐놓고 가족들은 가져간 과일과 과자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남은 여정을 위해 호텔을 나섰다. 1박 2일 여행의 2일째 첫 여정인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해오름예술촌을 들렸다. 해오름예술촌은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이 소장 되어 있고, 다양한 전시회와 알 공예 도자기공예 그리고 천연염색체험도 가능하다고 전해 들었으며 이곳에는 그 옛날 우리 선조가 사용하던 요강들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본디 여행은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도보로 하는 것이 구석구석 골고루 살펴볼 수 있음인데 몸이 성치 못하니 아무리 경관이 좋고 경치가 아름다워도 수박 겉핥기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막상 해오름예술촌을 들렸으나, 예술촌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미적으로 돌계단도 만들고 언덕도 만들어놓은 탓에 휠체어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나로선 해오름예술촌을 구경하기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을 입구 정문에서 대충 보기에도 해오름예술촌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내 한 사람 때문에 가족들조차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을 등 뒤로 남겨놓고 얼마쯤 가다 보니 차창 밖으로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가천 다랭이마을이었는데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마을 집집이 담장 벽과 지붕에 농촌의 실제 생활 모습과 가천 다랭이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 그리고 갖가지 꽃들을 벽화로 그려놓았었다. 쉽게 접할 수 없는 모습들이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라 여겨진다. 우리 현대인들이 사는 지금 이 시대는 정보의 시대이며 홍보의 시대라는 말이 실감 나는 한 장면이었다. 귀가할 시간이 촉박하여 원예예술촌 마을을 두루 돌지 못하고 입구에서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수십 년 전 우리나라 간호사나 광부들이 외국 취업으로 일터를 찾아 독일로 나갔던 적이 있는데 세월이 흘러 그들도 나이가 들고 현직에서 은퇴하여 귀국하려 하니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영구 정착할 곳이 마땅치 않자 정부에서 그들만의 정착촌으로 지정해 주었던 곳이 지금의 남해 독일마을이다. 이 독일마을 역시 시간도 부족했었지만, 집들을 구경하려니 휠체어로 이동하기엔 부적합하고 많이 불편하여 아쉬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놓아야 했었지만, 겉으로 보고 느끼기엔 우리나라 시골 풍경이 아니라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외국의 어느 정통적인 시골 마을의 모습들이었다.
원시어업 죽방령 보물섬을 스쳐 구경하였다. 이곳은 다른 고장에선 접할 수 없으며 남해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적 자산이라고 했다. 물살이 빠른 갯벌에 참나무를 박아서 잘게 쪼갠 대나무로 각 막대 사이를 망을 엮어 만든 원시어업으로 고기를 잡기도 한다고 했다. 마침 점심을 먹으러 어느식당을 찾았다. 식당주인께서 권하는 원시어업으로 잡은 멸치를 맛볼수 있었다.
귀가하는 자동차 안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다른 때도 아니고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 이처럼 귀한 행운과 행복이 나를 찾아주었는지를 자문하고 독백하는 나의 대답은 예상외로 간단했었다. 기축년(己丑年) 한 해 동안 내가 사랑했었던 이들보다 경인년(庚寅年) 한 해 동안엔 더 넓은 가슴으로 더 많은 사람을 품어 안고 사랑하며 특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늘 나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해서 새로이 시작하는 경인년(庚寅年) 한 해 동안은 포유(布諭)하는 백호(白虎)가 되어 내 가슴속 저 밑바닥에 잔재 되어 있는 사랑을 펌프로 끌어올려 사랑에 굶주려 우는 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세상 모든 생명체에게 계산 없는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도 묵묵히 지켜보는 대자연의 사랑처럼 되기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