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수필

원한(怨恨)

松竹/김철이 2011. 7. 14. 06:52

원한(怨恨)

 

                                - 수필가/김철이 -

 

 

 본디 원한이란 단어는 욕구나 의지의 좌절과 그에 따르는 삶의 파국, 또는 삶 그 자체의 파국 등과 그에 처하는 편집적이고 강박적인 마음의 자세와 상처가 의식 무의식적으로 얽힌 복합체. 원한(怨恨)과 유사한 말로 쓰이기도 한다. 흔히들 사람들의 입속에서 쉽게 나오고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원)이고 (한)인데 특히 전 세계 수많은 민족에 비해 우리나라 민족들에겐 이 두 단어는 아주 친숙하게 다가오는 단어일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잠시 되돌아 보면 물론, 국력이 강하지 못했던 탓이겠지만, 우리나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주 먼 옛날부터 왜적의 침범으로 온 백성이 숱한 시련과 고통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았으나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이 외 중에서도 돈 많고 권세 있는 자들이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도 최소한의 해를 입으려 애를 썼을 것이고 돈 없고 권력 없는 중하의 층 백성은 고스란히 숱한 시련과 고충을 겪으며 가슴에 한을 쌓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남성우월사상(男性優越思想)이 팽배하여 빈부의 차이가 늦을수록 여성에 대한 권리나 인권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던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자 역사의 아픔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명문거족(名門巨族)이라 일컫던 권세나 지체가 높은 대갓집에선 대를 이어 내려온 체면 때문에 가문에 따라 여성에게도 교육은 시켰지만, 그 이유는 성장하여 남의 가문(家門)으로 출가(出嫁)하게 되면 가문과 부모 형제의 뼈와 성은 팔아먹지 말라는 뜻에서 여성인 딸자식에게도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서민층이라 일컫던 중인들 가문에서도 여성에게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고, 상민이나 천민들 가문의 여성이 배움을 갖는다는 것은 애당초 생각도 못할 일이었지만, 어쩌다 그런 말이 나올 양이면 여자가 세상을 많이 알고 세상에 대해 많이 배우면 천지가 개벽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큰일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여성은 아예 배울 꿈조차 꾸지 못하도록 부모들이 어릴 적부터 머릿속에 깊이 심어주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같은 민족이고 같은 생활풍습 속에서 생활하며 다 같이 세 끼니를 먹고 살았지만, 남성들보다 여성들의 가슴속엔 더 많은 원과 한이 서려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여성들이라면 지체가 높은 대갓집이던 중인들이나 천민이라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갖바치들의 가문의 여성들에까지 수시로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치미는 한과 원을 억눌러 삭히며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여성으로 태어나 어머니라는 이름표를 평생을 가슴에 붙이고 살아야만 하는 여성들은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갖은 애환을 겪을 것이고 그 삶의 무게를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어깨에 지고 간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으로 그 삶의 무게를 지고 가느라 가슴속엔 많은 한과 원이 맺혀 아무게나 쉽게 틀어놓지 못하는 삶의 응어리 탓에 한평생 속앓이만 하다 세상을 뜨는 여성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이혼율 전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안은 우리나라의 가정들, 본래 가정이란 남성과 여성이 만난 부부의 연을 맺고 부부가 주축이 되어 슬하의 자식을 낳아 가족이란 이름을 지어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생을 다 하는 날까지 행복하고 다복하게 생활하는 것이 세상 부부의 본분이자 도리이다. 세상 누가 뭐래도 부부의 연은 하늘에서 맺어준 천륜이다. 그러나 현대 가정에선 이 천륜마저 손바닥 뒤집듯 너무나 손쉽게들 한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현재 우리나라 가정들에 깊이 병들어 가는 병폐의 근본적인 이유는 가정마다 색다른 색깔의 이유가 있겠지만, 이 근본적인 잘못은 분명히, 남성과 여성들이 나누어져야 할 것이다. 주위를 살펴봐도 요사이 부부들은 이혼을 쉽게들 생각하는 듯싶다. 이 병폐의 근본적인 것 중 하나는 그 숱한 세월 우리나라 여성들이 너무 많이 참고 너무 오랜 세월 기다려 왔던 한과 원이 신세대 교육을 받고 나니 그동안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던 세상에 눈을 뜨니 전 세상이 한눈에 훤히 다 보였다는 것이고 무작정 참고 기다리기를 강요받아 왔던 여성들의 가슴속에서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던 한과 원의 요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한꺼번에 뛰쳐나온 탓일 것이다. 좀 더 심한 표현을 쓴다면 요즈음 세상 부부들은 이혼하기 위해 결혼을 하는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단어마저 서슴지 않고 떠오른다.

 

 이 잘못되어 가는 병폐에 교훈이 되고도 남을 만한 여성의 삶이 있기에 이 지면에 소개하고 가정과 가족을 너무나 손쉽게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곁으로 보고 느끼기엔 세상 어느 여인네보다 꼬이고 맺힌 한과 원이 많아 왠지 모르게 위축되고 기가 죽을 듯싶은데 그 무엇이 그렇게도 당당하고 의지 굳은 여성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지만, 평생을 늘 같은 위치에서 같은 모습으로 학처럼 고고하고 세상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그 삶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한 여성으로 살아가야 할 운명을 타고나서 세상 어느 아내보다도 어느 어머니보다도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리며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산처럼 쌓여가는 한과 원을 가슴에 묻으며 살아온 그 주인공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내 어머니이시다. 넓고도 넓은 세상엔 위인들도 많고 존경받을 인물도 많지만, 누군가 내게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고 묻는다면 첫 마디에 나를 이 세상 터전에 낳아주신 내 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며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칠십 평생을 사시면서 어느 여인보다 가슴에 묻고 살아오신 한과 원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 같다.  

 

 내 어머니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어린 나이에 가난하고 아물 한 시대에 태어나 어머니를 여이고 편부슬하(偏父膝下)에서 자라  배우지 못한 가난한 노동자인 남자와 결혼했다 한다. 어머니는 경상북도 경주에서 선비정신으로 사시던 부친(父親)과 한국의 전형적 여성상과 어머니상을 타고나신 모친(母親)의 슬하에 사 남 일 여 중 고명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갖은 사랑을 다 받으며 성장하셨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간혹 흘러간 옛 추억처럼 되이시는 얘길 듣고 있노라면 엄격하시면서도 사랑 많은 부모님과 우애 깊은 형제들 사이에서 다복한 생활을 하셨다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어머니가 세상에 태어나신 시대는 일제 강점기 시대라 어지간히 어렵잖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가정에서도 일제 군부에 농사지은 곡식을 공출을 받치느라 새하얀 쌀밥은커녕 꽁보리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세 끼니 밥 먹기를 굶듯 하였다던데 외가에선 그 시절에도 외할아버지의 높으신 지혜로 농사지은 곡식들을 집 뒷마당에 땅을 파고 그 속에 큰 독들을 묻은 다음 독 속에 일제 군부의 눈을 피해 농사지은 곡식들을 감춰놓고 온 가족이 희디흰 쌀밥으로 별다른 고생하지 않고 생활했었다 한다.

 

 내 어머니는 열여덟 되던 해 정월 초아흐렛날 동지 죽을 끓일 준비로 집집이 쌀 빻는 절굿공이 소리로 요란할 적에 매파(媒婆) 역할을 했던 먼 친척 아주머니의 중매로 혼숫감이라야 저고리 겉감 한 벌을 받고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손위 외숙부님의 결사반대를 뒤로하고 평생을 벗어날 수 없는 고생문을 자청하여 들어서신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이 굳었기에 외할아버지께서도 더는 반대할 수 없어 허락하셨고 이 길은 자신이 택했으니 누굴 탓하겠느냐만, 어머니가 선택하셨던 이 고생문은 한 여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차고 신었던 신발을 벗어들고 달아날 만큼 두렵고도 무서운 문이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온 유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는데 어머니가 칠십 평생 가슴에 품었던 한과 원을 손가락으로 헤아린다면 열 손가락으로도 훨씬 부족할 것이고 온 유월에 서리가 내렸어도 열두 해를 내리고도 충분히 남았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열아홉 되던 해 혼인한 지 두 달도 채 못되어 첫 번째 이별의 아픔과 한을 안아야 했었다. 결혼하고 바로 그 이듬해 정월 초닷샛날,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고 마른 날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당시 먼 친척 아저씨가 경영하던 철공소에서 용접기술자로 일하시던 아버지, 결혼도 했고 책임져야 할 아내도 맞았으니 좀 더 대우가 낳은 공장으로 일터를 옮기려 하니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서는 어떤 직종이든 한 일터에서 요구하는 기술자라는 패스포트를 직장 장이 일본 군부에 발급해 달라고 요청하면 철저한 조사 끝에 패스포트를 발급해 주었는데 이 패스포트를 발급받은 기술자는 어느 직장으로 옮겨가든 그 패스포트만 있으면 그 당시 젊은 남성이라면 예외 없이 끌려갔던 일본 강제노역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 형편을 다 알고 있고 보충 설명을 충분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직장으로 옮기려 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앙심을 품은 그 먼 친척 할아버지는 용접기술자 패스포트를 끝내 건네주지 않아 아버지는 신혼생활을 경험해 볼 시간도 없이 일본 강제노역 길에 올라야 했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두고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사촌보다 못하다는 속담이 생겨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가 일본 강제노역을 끌려가실 그 무렵, 어머니 배속엔 슬하의 사 남 일여 중 첫 아들이 수태되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기쁨 소식조차 알지 못한 채 일본행 뱃전에 오르셨다는 것이다. 대대로 자손이 귀했던 우리 가문에서 아들이건 딸이건 자손이 수태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더없는 축복이자 기쁨이 아닐 수 없는 큰일인데 정작 자손을 수태시킨 아비가 이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살아서 돌아올지 죽음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는 사지로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아버지를 역사의 제물로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는 이십 대 후반 청산에 홀로 되어 아들 둘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재혼의 유혹마저 물리치신 홀 시아버지를 열성을 다해 봉양(奉養)하며 까다롭기로 소문난 동갑내기 시동생 갖은 비위 다 맞추어 가며 당시 부산 동구 범일동 안창마을 산동네 판잣집 단칸방에서 주야장천 남편의 무사귀환만을 부처님 전에 빌고 또 빌었다고 먼 훗날 병든 둘째 아들을 앉혀놓고 바람결에 스쳐가는 이야기처럼 무심코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 사이 혼사를 치룬지 두 달도 채 못되어 홀연히 떠나보낸 아버지의 빈자리가 태산과 같았을 텐데 그 빈틈을 비좁고 첫째 아들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남편도 없이 혼자서 외롭게 자식을 낳아 품에 안은 어머니,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한다. 그 사이 어머니의 가슴속엔 한과 원의 씨앗이 점차 자라기 시작했고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아들은 장차 대통령감이라는 이웃들의 칭찬을 한몸에 다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주었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젖먹이 아들을 품에 안고 올리는 젊은 아낙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음인지 아버지가 일본땅으로 강제로 끌려가신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가던 해 동짓달 스무 이래 되던 날 그날도 겨울 혹한이 극성을 부렸고 산동네 부는 겨울 찬바람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한다. 그날 밤도 초저녁잠이 짙으셨던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아랫목에서 주무셨고 삼촌은 이웃 친구네 집에서 놀다 자고 오겠다며 나가고서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의 품에 안겨 자는 젖먹이 어린 자식을 내려다보니 울컥 복받치는 서러움에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것이다. 아무리 서러워도 행여 홀 시아버지가 아시고 마음 아파하실까 봐 행여 품에 안은 젖먹이 아들에게 엄마의 서러운 마음이 전해질까 봐 마음 놓고 속시원히 한번 울 수 없는 그 심정 뉘라서 알리요 주무시던 할아버지께서 잠결에라도 눈치채실 것 같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얼른 손으로 훔치고 돌아눕는데 한 자락 세찬 바람이 양철 지붕을 요란스레 흔들 무렵 바람결에 방문 밖에서 드려오는 모기만 한 소리, “자나?” 순간 어머니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추운 동지섣달 엄동설한에 무슨 모깃소리냐 너도 나만큼이나 한이 많나 보는구나 여태 떠나지 못하는 걸 보니….” 그러나 잘못 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자나?” 두 번째 부르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앉기는 했으나 얼른 방문을 열지 못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살며시 문을 밀치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일 년이 다 되도록 편지 한 장 없어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아버지가 거지도 쌍 거지의 몰골을 한 채 문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뒤늦게 할아버지가 잠에서 깨셔서 다섯 칸 집 판자촌엔 함께 살았던 이웃들이 다 뛰쳐나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며 아닌 밤중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한다. 1945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8월 6일에는 일본 히로시마[廣島(광도)]에 한 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할 당시 히로시마로 끌려가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강제 노동을 하시던 아버지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히로시마 전 도시가 아비규환으로 변한 틈을 타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센다이 시로 원폭시 상처를 입은 왼다리를 질질 끌며 숨어들어 어느 일본 여인의 도움으로 두 달 보름을 그 일본 여인의 집에 숨어 다쳤던 다리를 치료하며 지내다 역시 일본 여인의 목숨 건 도움으로 조선행 배를 타고 한 달여 만에 조선으로 들어왔으나 그 당시 우리나라도 온통 일본군 천지가 되어 곳곳에 일본 경찰 앞잡이들이 숨어 있었던 터라 그들의 눈을 피해 야밤을 택하여 일 년여 만에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던 것이다.

 

 내 어머니는 금쪽같은 세 아들을 가슴에 묻은 채 오십 년을 사시다 가신 셈이다. 옛말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다 묻고 자식이 부모 앞에 세상을 뜨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생전 잊지 않고 돌본다고 했는데 하나도 아닌 세 아들을 가슴에 묻은 샘이니 가슴에 쌓은 그 한과 원이야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위로 두 아들은 어릴 적 인생을 꽃피워 보지도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었고 넷째 아들은 병마의 사슬에 빼앗겨 장애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자식을 지켜보며 가슴앓이를 하셨으니 세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고 늘 자신을 자책하며 한탄하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장차 우리나라 대통령감이라고 그렇게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던 첫째 아들은 네 살 되던 겨울 홍진을 하는데 토속신앙적으로 흔히들 얘기하는 부정을 타서 불과 두 시간 여 만에 생때같은 자식을 잃었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다섯 칸 판잣집 한 지붕 아래 아버지의 오촌 당숙께서 함께 사셨는데 그날은 아들이 홍진을 하느라 어린 몸으로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서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아버지도 출근하지 않고 어머니와 번갈아 가며 심한 고열로 깜짝깜짝 놀라는 아이를 놀라지 않게 안아주고 있었는데 심적 육적으로 많이 지쳐 자고 있던 아버지를 건넌방에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부르셔서 나가니 오촌 당숙이 건넌방 마루 밑에 뭘 갔다 놓았다 하니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무심코 건넌방 마루 밑을 들여다보니 피를 흘리며 죽은 닭 한 마리가 있더라는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가져오라 시니 갔다 드리긴 했으나, 아기가 홍진을 앓는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동짓달 강추위도 무릎 쓰고 부엌으로 들어가 얼음 같은 찬물에 머리를 감고 집 밖을 배회하고 있을 때쯤 저녁밥을 지어야 하니 들어와서 교대로 아기를 좀 안아달라는 어머니 말에 마지못해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애절하고 원망스런 눈빛으로 아버지 얼굴을 한번 올려다본 아기는 힘없이 눈을 감더라는 것이다. 아기가 하늘나라로 떠나고서 들어보니 그날 아버지 오촌 당숙이 외출에서 돌아오다 당시 범일동 삼일 극장 뒤에서 개 한 마리가 거리에서 먹이를 쪼던 닭을 물어 죽이자 아버지 당숙이 죽은 닭을 들고와서 건넌방 마루 밑에 던져두었는데 그걸 아버지더러, 시켜 가져오라 하자 영문도 모르셨던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불러 가져오라고 했던 것인데 깊은 생각도 해볼 겨를도 없이 자다 말고 죽은 닭을 들고 부모님이 거쳐 하던 방을 지나 건넌방 마루로 건너가려 하니 마치 하늘에서 그 무엇인가 덮어씌우는 듯한 무서움에 죽은 닭을 오촌 방문에다 훌쩍 던져놓곤 부정을 탔다는 생각에 급히 부엌으로 들어가 동짓달 얼음물에 머리를 감고 자신의 잘못을 빌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갖은 재롱과 모습만 남겨놓은 채 아기는 부모의 품을 떠나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할 자격은 누구에게 없다지만, 어머니는 시 당숙을 미워하기는커녕 근본적으로 귀하디 귀 한 자식과 하루아침에 생이별을 시킨 당숙을 예전처럼 대하였고 훗날 봉양할 자식이 없었던 오촌 시 당숙을 마치 친 자부(子婦)가 시부모님을 봉양하듯 정성을 다해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 드리다 돌아가실 무렵엔 대소변을 받아냈다. 마지막 날엔 임종(臨終)해야 할 친자식들을 대신하여 저승으로 외롭게 떠나는 방자(亡者)의 손을 잡아 드렸다 했다.

 

 내 어머니의 가슴에 한을 맺히게 했던 아픔이 어찌 이뿐이었겠는가. 그렇게도 허무하게 첫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그 아픔이 채 가시기 전 둘째를 가졌는데 낳으니 또 아들이었고 그 둘째 아들 역시 생김새가 출중하여 이웃 어른들을 비롯한 뭇사람들의 칭찬을 한몸에 다 받아가며 무럭무럭 잘 자라다 두 돌이 채 못되어 병명조차 알 수 없는 병마에게 둘째 아들마저 하루아침에 피다 지는 나팔꽃처럼 한순간에 잃었다고 했다. 하나 자식을 잃었어도 실의에 빠져 헤어나기 어려웠을 텐데 꽃다운 나이에 자식을 둘이나 잃었으니 그 한 맺힌 아픔이야 어이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있었겠는가… 둘째 자식을 잃고 나니 어머니는 행여라도 이웃에서 자식 잡아먹은 어미라고 손가락질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자책에 부끄러워 얼마간 바깥출입조차 하지 못했고 후손을 애타게 기다리셨던 할아버지께서도 당신 손으로 손자 둘을 땅에 묻으셨으니 당신이 복이 없어 그렇다시며 심한 자책으로 일관하시다 결국 화병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무렵 셋째 손자가 며느리 배속에 수태된 줄도 모른 채 눈을 감으셨다.

 

 내 어머니의 가슴에 서리서리 맺힌 한과 원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6, 25동란 당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직장 상사의 협박(脅迫)과 강요强要, 그리고 자신들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노부를 비롯한 네 식구의 밥줄이자 생명줄인 직장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회유(誨諭)에 견디다 못해 보도연맹(保導聯盟)이란 단체에 가입했다. 우리나라 군, 경에 의해 억지 자백을 강요받고 갖은 고문으로 반 송장(送葬)이 되어 돌아오셨던 아버지의 병간호를 할 때에도 병든 자식을 무릎에 눕혀놓고 갓난아기였던 두 살 아래 딸자식을 돌보아 가며 성냥갑을 붙여 한 푼 두 푼 피눈물나게 모은 돈으로 일평생 소원이었던 내 집을 마련했으나 역사의 제물로 한순간에 자취도 없이 허공으로 날아갔을 때에도 못살아 목이 부러져라. 머리에 이고 다니며 보세가공 옷 손질을 할 때에도 자식을 잃고 자식이 병들어 평생을 장애를 지닌 채 살아야 한다는 의사의 청천벽력같은 선고를 받았을 때만큼은 서럽지 않았고 가슴에 그렇게 큰 원한도 남지 않았다고 하셨다. 얼마나 자식에 대한 포부가 컸으면 세상에 둘도 없이 큰 제물과 자식과는 바꿀 수도 없지만, 설사 돈에 눈이 뒤집힌다 하여도 자식을 놓고는 아무런 흥정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는 자식에 대해 한도 많고 원도 많은 사람이라 저승 갈 때 눈이나 감고 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살아생전 몇 차례 들은 바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하늘나라 가시기 전날, 내 어머니 마지막 뵌 모습은 산소호흡기를 착용하신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평생을 불효밖에 드린 것 없는 천하에 둘도 없는 이 불효자식을 우러러보시곤 쉬 눈을 감지 못하셨던 같다. 요 며칠 사이 국내 보도기관을 통해 보도된 내용을 보고 듣자하니 너무나 기가 막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잊었다. 오락 게임에 빠져 열 달 동안 제 뱃속에서 생명줄을 타고난 자신의 분신인 젖먹이 어린 자식을 굶겨 죽인 천하의 용서받지 못할 엄마가 있는가 하면 공중화장실 변기 속에 아기를 낳아 몰래 버려놓고 달아나는 비정의 엄마가 내가 살고 내 어머니가 살았던 하늘 아래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더는 말을 잇기가 싫어진다. 분명히 하늘에 계신 내 어머니도 이 어처구니없는 광란과 작태를 보셨을 텐데 과연 뭐라 말씀하실까? 실로 궁금해진다.    

 

 내 어머니는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삼 주 만에 고열로 경 끼를 하며 생과 사의 험난한 문턱을 넘나들고 있을 무렵 가까운 피붙이로부터 낳은 아기가 이대로 자라봐야 사람 구실 하기 어려우니 그를 바에야 마음이 아파도 차라리 정들기 전에 장애아 시설이나 고아원에 데려다 주자는 말을 들었다 한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어머니는 그 말을 일축하며 들어볼 자치도 없다며 이 아이가 당신네 자식이라 하여도 그런 말을 하겠느냐며 반문하였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하늘도 무섭지 않느냐며 난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천륜(天倫)만은 배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늘이 내게 맡기신 나의 자식이니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온 힘을 다하여 키워내겠다며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이 호언장담(豪言壯談)이 옳았던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그 판단은 하늘이 내리겠지만, 자식의 입장에서가 아닌 같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분신인 자식을 생각하시는 그 정성, 그 사랑만은 높이 사고 싶다.

 

 내 어머니에게 있어 자식들은 세상 그 무엇보다 고귀한 존재이자 가슴에 한과 원을 지니게 했던 불효 막 급한 존재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또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어머니의 근심 걱정을 안고 태어난 셋째 아들은 세상 어느 아기들보다 건강하게 태어났고 건강하게 자라줬으나, 그 기쁨도 잠시 세 살 터울로 태어난 넷째 아들 역시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하늘의 무슨 깊은 뜻이 있었길래 무슨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기에 어머니 가슴에 평생 빼 드리지 못할 대못을 박고만 장본인의 삶을 살게 된 것일까… 넷째 아들인 필자는 병마의 사슬에 묶여 평생을 어머니 가슴에 한과 원만 쌓게 해 드린 천하의 불효자라는 오명(汚名)과 불명예(不名譽)는 내 죽도록 안간힘 다 써봐도 씻을 수 없는 지금 하늘에 계신 내 어머니께 몇 자 글귀를 띄운다. 언제나 어머님의 무릎을 부여안고 당신 가슴에 맺힌 한과 불효자식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 하소연해보나요. 그럴 수 없는 아쉬움에 어머니 날 낳으시매 제게 주신 그 은덕에 감사와 깊은 경의(敬意)를 표하며 피눈물에 먹을 갈아 어머님 영전(靈前)에 엎드려 돈수재배(頓首再拜) 올리겠나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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