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부활 제6주일)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시여 당신을 알아뵙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예수님의 고별담화가 지난주에 이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별을 알리고 믿음을 촉구했다면 (14, 1 – 12), 오늘 말씀은 보호자의 파견 (15 – 17절) 과 예수님의 귀환을 약속 (18 – 21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사랑과 믿음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결속관계의 기반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 (15절) 이며,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 (21절) 이라고 두 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으로써 (23 – 24절) 새로운 계명을 의미합니다.(13, 34 – 35) 계명을 지키는 것은 ‘준수한다’ 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마음에 새기어 기쁨으로 생활화하는 항구한 믿음과 깊은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와 사랑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제자들을 위하여 “다른 보호자”, 곧 “진리의 영” 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16. 17절) 다른 보호자라는 표현은 예수님 친히 일차적인 보호자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는 견지에서 예수님은 천상에서 지상의 제자들을 도와주는 보호자이십니다. (1요한 2, 1 참조) 다른 보호자는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요한 14, 16) 머무시며, 진리를 증언할 뿐 아니라 제자들을 진리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16, 13; 1요한 5, 6 참조) 성경에서 ‘진리’ 는 계시의 총체적 개념이지만,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나타냅니다. (요한 14, 6) 따라서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진리의 영 안에 함께 계시며 성령을 통해 활동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과의 유대관계를 끊임없이 유지해 가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과 “제자들” 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서로 분리됩니다. (17절) 그것은 성령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에서 시작되는데, 안다는 것은 전인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은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제자들은 성령을 “알고” 받아들여 “함께” 생활함으로써 (17절) 성령은 제자들 안에서 그들의 내적인 힘과 역동성을 부여합니다. 또한 성령에 힘입은 그들은 제자로서 자신의 신원을 명백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귀환약속은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 (18절) 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표현되며, “이제 조금만 있으면” (19절) 과 “그날” (20ㄱ절) 은 죽음의 시간을 넘어 부활 이후에 제자들과의 만남을 준비합니다. 믿음은 어둠과 빛을 갈라놓듯이 세상과 제자들을 분리시킵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이 어둠의 터널로 들어갈 때 믿는 이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과 불신으로 더 이상 그분을 “보지 못하겠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새 생명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19절) 그때에 제자들의 나약했던 믿음은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채워져 굳건하게 되며 (7 – 11절 참조), 하느님 영광에 참여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이루신 일치를, 이제는 부활한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루게 됩니다. (20 – 21절)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그리고 ‘그들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일치의 충만함을 누리며, 계명을 지키는 사랑의 삶을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모든 믿는 이들은 제2독서의 말씀대로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거룩히 모시고 생활하는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1베드 3, 15)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사랑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 과 연계를 이루며 부활한 주님을 알아뵙는 근간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20, 18; 21, 7 참조)
묵상 (Meditatio)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16절),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8절) 는 예수님의 약속이 부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 예수님의 약속은 믿는 이로서의 특권이 아니라 새로운 계명을 생활하라는 소명에로의 부르심은 아닌지 묵상해 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힘입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뵙고,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17ㄴ절) 세상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려주고 보여주는 삶으로 그리스도의 은총을 누리는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 19 – 20) 라고 다그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 믿습니다. (2코린 5, 14)
기도 (Oratio)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그 행적 경외로워라. (시편 66, 5)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강론 두레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하늘은 어디에? (0) | 2011.06.04 |
---|---|
[교황청] 제26차 청소년 주일 담화문(요약) (0) | 2011.05.28 |
[춘천] 아! 집이 없구나 (0) | 2011.05.28 |
[군종] 사랑을 실천하는 삶 (0) | 2011.05.28 |
[부산] 진리가 내 안에 있음을… (0) | 2011.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