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요한 20, 19-31. 1베드 1, 3-9./서공석 신부(부활 제2주일)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고, 토마스 사도가 신앙을 고백한 이야기였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이 어떤 집에 모여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이면, 오늘의 주일입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날이라 부르던 요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비밀리에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하신 일을 회상하며, 그분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하신 이별의 식사를 기념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오늘의 발현은 이 집회 중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발현 때,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여드레 후면, 일주일 후를 의미합니다. 이 두 번째의 발현도 주일의 집회에서 있었습니다. 토마스가 하는 고백,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고백입니다. 그들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발현하셔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성령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숨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졌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의 죄든지...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이 반영된 말입니다.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여 강조하는 유대인들의 화법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구약성서 창세기(2,7)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 모상에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숨결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생명을 사는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보여 주신 진리, 곧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잘 지키고 잘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받겠다는 그리스도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강한 자와 함께 계시지도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베드로 1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신앙인이 되어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새로운 생명, 곧 자비를 실천하는 생명을 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인 기원후 100년 경, 교회는 이미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베드로의 편지는 요한복음서보다 40년가량 먼저 기록되었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뜻이 아니라, 그 시대 신앙인들의 실태를 반영한 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시대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 보지 못하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그분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존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자기 생존의 의미를 읽어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의 생존을 가장 큰 과제(課題)로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을 믿으며, 그분의 일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그 생명을 사는 자녀들도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정체성이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면서 우리는 현명하게 처신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밀림 속 동물의 처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용서와 사랑을 모르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처세술입니다. 어린이들은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어린이에게는 성숙한 인간의 자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미숙하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익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미숙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용서하지도 못하고,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미숙함을 넘어서 스스로를 베풀어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의 자유를 실천해 보인 분이었습니다. 그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이 하신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모순된 일들이 많습니다. 선의의 사람이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불행하게 태어나서 불행하게 살다 가는 생명들도 많습니다. 정직하게 노력하고도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모순들 앞에 주어진 답이 예수님이 가르친 아버지이신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질서 안에 계십니다. 그 질서를 실천하며 산 사람은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질서를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사랑과 용서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인간의 삶 안에 있었습니다.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었던 인류역사는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 용서 안에 하느님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여 당신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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