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오월을 시작하며/지성용 신부(부활 제2주일)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요한 20,19) 가엾은 여인 막달레나가 체험한 주일 아침 예수의 부활 사건은 저녁이 되어 정점에 도달한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문을 모두 잠궈 놓고 있는데 예수가 다시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성령을 받아라” 그리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두려움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을 때 예수가 나타났고, 뒤늦게 합류한 토마스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대답한다. 하지만 “그 못자국에 나의 손가락을 넣어보고, 그 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본다면(직접 체험한다면 믿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말한다.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 내부의 원천적인 조건이 구체화되는 것을 ‘초월’이라 말한다. 초월은 ‘위’로나 ‘밖’으로가 아니라 ‘안’, ‘근본’, ‘원천’으로서의 방향성을 지닌다. ‘신앙’이란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인격적 결단이다.
토마스는 결국 자신을 ‘포기’하고서야 초월할 수 있었고 신앙할 수 있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자신의 근본으로 원천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절대적 은총’(당신 자신을 스스로 보여주시는)에 기인했다.
‘포기’란 인간이 자기 실존의 중심을 이 세상 밖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을 눈에 보이게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시화시키는 유일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현세적인 자아를 포기하는 길 뿐이다. 더 이상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더는 자기 자신에 속하는 것이 없을 때 그래서 나 자신마저 사라져갈 때, 그 때가 바로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시간이며 우리의 구원의 시간일 것이다.
‘영(靈)’이란 세계를 넘어서 형이상학적인 것을 아는 힘을 의미한다. 인간은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기만 할 뿐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주면서 세계를 넘어선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키고,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하고,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희생하고, 하느님 사랑이 죽음 같고 절대적 부정 같아 보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와 같은 일이 우리 안에 참 많이 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이다. ‘영(靈)’을 체험한 것이다.
인간의 의의란 이 세상의 의미나 가치, 행복으로 다할 수 없는 경험, 현세적 성공으로 뒷받침 할 수 없는 그 무엇, 결국 영(靈)으로서의 인간이란 단지 사변적으로뿐 아니라 실존적으로 신과 세계, 시간과 영원의 접경에서 살아가야 한다. 용서해야, 세상을 뛰어 넘어야 성령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평화가 우리 가운데 시작된다.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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