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수필

넋(魂)의 노래

松竹/김철이 2011. 3. 2. 12:01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세월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궤변을 늘어놓느냐며 호되게 꾸지람을 내릴 어른도 계실 테고 유수같이 흐르는 세월에 무슨 얼토당토 않는 소리냐며 나무라는 이도 있을 테고 세상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왜 늙지 않고 늘 젊게 살려 악을 쓰며 몸에 좋고 조금이라도 더 젊어진다는 보약이나 식품, 또는 건강에 좋은 운동이나 자연식품을 찾아 며칠을 투자해서라도 어디든 달려가는 판국에 넌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도 되느냐며 아닌 밤중에 잠 덜 깬 소리 말고 계속해서 자던 잠을 자라며 심하게 핀잔을 주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옛날 말에 흐르는 물을 그 누가 막으려 했는데 요즘엔 현대 과학의 힘을 빌려 아래로만 흐르는 물조차 위로 거슬러 올리는 시대에 덧없이 흐르는 세월을 역행시켜주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죽지 않는 생명으로 언제까지나 살아 숨 쉬는 추억이라는 것이다.

 

 추억이라는 것은 무수한 세월이 흘러도 옛모습 그대로이다. 어린 시절 먼저 세상을 떠난 장난기 많았던 친구의 모습도 젊은 시절 둘도 없이 깊은 형제애를 나누다 헤어진 형제의 모습도 그리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살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다정스런 모습도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예전의 그 모습 그 표정 그대로이다. 

 

 어린 시절을 되돌려 회상해 보면 잊지 못할 기억 중 가장 잊혀 지지 않고 생명을 지닌 것처럼 지금 이 순간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추억은 아버지의 노래하시는 모습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은 있지만, 아무리 살 주고 뼈주신 내 아버지라고 하나 어쩌면 그다지도 노래를 맛깔 나게 부르셨던지 간혹 생각해 보아도 부친이 아닌 같은 남자로서 부럽기 그지없고 생활고 때문에 평생을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해보고 가셨지만, 아버지께 대한 죄송함과 미안함으로 정말 폼나고 멋진 인생을 사셨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본성이 여리고 정이 많으셨던 아버지께선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슬하에서 자라신 탓인지 마음이 따뜻하고 잔정이 많아 작은 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시는 성품이셨다. 특히 아버지께선 다른 이들에 비해 흥이 많아 어떤 층의 벗이던 늘 친구들이 주위를 떠나지 않고 늘 맴돌았었다. 아버지께서 집에 친구 분들을 자주 데려오시곤 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동반하는 것은 노래였다. 집을 찾은 친구 분들과 입을 것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벗들의 정담을 안주 삼아 술을 드시다가 술기운이 근하하게 오르시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술안주를 집어먹던 젓가락 두 짝으로 상을 두들기며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덕에 어머니께서 새로 사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밥상 여러 개가 흠집을 내며 망가지곤 했지만, 어머니 없이 외롭게 자라 늘 외로움을 타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는 어머니께선 단 한 번도 원망하고 타박하시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본디 어릴 적 꿈이 가수였던 아버지께선 평소 생활하시면서도 항상 노래를 잊지 않고 즐겨 부르셨다.

 

 선천적으로 운동과 기계를 다루는 기술, 그리고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과 끼를 타고나신 아버지께선 운동이면 운동, 기술이면 기술, 특히 예능 방면에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 계셨다. 해서 아버지의 꿈도 어린 시절부터 노래하는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하여도 노래하는 가수나 악극단에 속해있던 배우들, 그리고 영화배우들은 올바른 대우를 받기는커녕 행세께나 하고 산다는 지반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도 할아버님의 완고하신 반대가 없었다면 국민의 따가운 시선과 손가락질에 맞서 그렇게 소망하던 가수가 되셨을 것이라 한다. 가수가 되시지 않았던 일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 가슴속에서 평생을 숨죽이며 살아왔을 끼와 한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시려 온다.

 

 한평생을 당신께서 좋아하고 원하셨던 삶은 등 뒤에 감추어 놓으시곤 헌신적으로 자식들을 위한 삶을 사셔야만 하셨던 아버지께선 죽지 않고 매 순간 꿈틀 되며 용트림하는 가슴속 한을 주체하지 못하셔서 때로는 혼자만의 대화법으로 콧노래를 흥을 되셨고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낚시 도구를 챙겨 어깨에 메시곤 사방이 탁 틘 바다를 찾으셨다. 아직도 잊히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설이나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차례를 지내시고 혼자 술을 드시고 힘겨운 세상살이에 자주 찾아가지 못하는 고향 생각에 조용히 망향가(望鄕歌)를 부르시며 아내와 자식들이 볼세라 몰래 눈물을 훔치셨다. 그런데 이 눈물이 막연하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흘리셨던 눈물만이 아니었음을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겉으로는 망향(望鄕)의 눈물로 보이나 속으로는 일찍 세상을 등지신 부모님을 향한 애틋한 눈물이었고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혈육이라고는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인 동생을 멀리 떨어져 생활했던 탓에 자주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남달리 손재주가 뛰어나셨던 아버지께선 어떤 기계든 못다루고 못 고치는 기계가 없었지만, 악기를 다루는 재주마저 뛰어나 당시 우리나라 장고의 일인자라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했었다. 그 덕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어머니께서 남몰래 적지않은 속 앓이도 하셨던 시절도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에선 국악기로 양음악을 연주하기에는 아버지께서 최초가 아닌가 싶다. 직접 장고로 반주하시며 고 진방남 선생님께서 부르셨던 꽃마차를 부르실 땐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현이 합당할 정도로 진방남 선생님의 음성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던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의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또한, 고 남인수 선생님의 음성을 모방하며 남인수 선생님께서 생존에 남기신 무너진 사랑탑을 비롯한 애정산맥, 산유화, 이별의 부산정거장, 애수의 소야곡 등을 모창하실 땐 아무리 모창이라지만, 남인수 선생님의 음성과 어쩌면 그렇게 닮을 수 있는지 온몸에 소름이 끼쳤고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늘 외로운 생활을 하셨던 탓에 누구보다 다정한 벗을 곁에 두기를 원하셨고 벗이 좋아 벗과 함께 술을 드셨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시면 벗들과 헤어져 귀가하시면서 언제나 우리 형제들에게 줄 간식거리를 사 들고 오시곤 하셨다. 하다못해 사오실 것이 마땅치 않으면 길가 리어커 행상에서 번데기라도 사 들고 오셨지 결코 빈손으로 들어오셨던 날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은 모두가 나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옛속담도 있듯이 간식거리를 사 들고 귀가하셔서는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우리 삼 남매의 귀속에 못 딱지가 앉을 정도로 되새김질해 주셨는데 콩 한쪽이 있어도 반드시 다툼없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으라는 것이고 어떤 경우가 있어도 형제간의 작은 다툼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어느 날 우연히 취중에 흘리시는 말씀을 어머니께서 듣고 훗날 내게 해주셨는데 다른 형제들은 육신이 성하니 돈만 가지면 언제든 얼마든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나가서 사먹을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몸이 성치 못하니 먹고 싶은 것이 많아 산더미 같아도 참고 견딜 뿐이지 누군가 사주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사탕 한 개라도 사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해서 호주머니에 용돈이 궁하여 그렇게도 즐기시는 약주를 드실 돈이 없어도 우리 삼 남매 간식거리만큼은 잊을 수 없다시던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아버지께 대한 한가지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약주를 조금 과하게 드시고 귀가하시는 날이면 언제나 같은 모습, 어린 둘째 아들을 부둥켜안은 채 묵묵히 뜨거운 눈물을 쏟곤 하시는 모습이었다. 다급했던 나머지 일순간 생각 부족으로 영특하고 잘났기 그지없는 자식을 평생 기 한번 제대로 펼 수 없을 장애의 멍에를 등에 지워주었다는 아버지 자책의 눈물이 어린 불에 떨어질 때엔 왜 그다지도 뜨겁고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왜 그렇게도 보기가 싫었던지 아버지께서 퇴근하실 시간이 넘도록 귀가하시지 않으면 어린 소견에 마음이 불안했었고 아버지께서 대문밖에 들어오시는 소리가 들리면 만취하신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안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달아나 숨기도 하였고 자지 않아도 자는 척 눈을 꼭 감은 채 숨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께서 얼른 눈치를 차리시고 자는 아이는 왜 깨우느냐며 일부러 심한 핀잔을 드려 주무시게 하시곤 하셨다.

 

 북방 산천 가시는 길이 뭐이 그리 급하셔서 그리 많지 않은 연세에 고인이 되신지 4년이 넘은 지금도 추억 속 생명체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삼주만에 심한 고열로 앓는 둘째 아들을 급한 나머지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주사를 맞혔던 그 일이 천추(千秋)의 한으로 남을 줄이야 멀쩡하던 자식의 일생에 일순간 1급 장애라는 멍에로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갈 비운을 안겨주었다며 늘 자책하시며 눈물로 한탄가(恨歎歌)를 부르시던 모습이 이 순간에도 눈에 선하다.

 이젠 뵙고 싶어 불러보아도 다시는 되돌아오실 순 없지만, 아버님 영전에 무릎 꿇어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아버님 살아생전에 제 몫이나 다 하고 사는지 늘 걱정하셨던 이 못난 자식 그래도 제 앞가림 다 하며 나름대로 제 몫 다하고 사니 이제는 자책 마시고 한평생 고생하셨으니 이제 저세상에서나마 편히 쉬시라는 말씀과 하실 수 있다면 꿈길이라도 좋으니 살아생전 부르시던 그 음성으로 노래 한 곡 맛깔 나게 불러주십사 하는 심정 간절하다.

 

 이젠 내 남은 삶에 들어보지 못할 추억의 노래가 되었지만, 내 영혼 속엔 아직도 아버님 젊었던 시절 그 모습 그대로 그 음성 그대로 추억의 노래가 아니라 아버님 넋(魂)의 노래가 지금 이 순간도 생생히 살아 귓전에 맴도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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