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두레박

[부산] 연중 제 17 주일 강론

松竹/김철이 2010. 7. 23. 21:53

[부산] 연중 제 17 주일 강론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기도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고, 예수님은 기도할 내용과 기도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치십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목욕재계(沐浴齋戒)로 준비하라는 말씀도 없고, 제물(祭物)을 바치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기도를 위한 자세도, 복장도 없습니다. 기도를 위한 특별한 장소에 대한 말씀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의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기도문의 내용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르면서 기도는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부르면,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오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들을 보살피듯이, 사랑하고, 베풀고, 용서하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계셔서 자녀들이 안심하고 행복하듯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리스도 신앙인도 행복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베푸셨다는 사실과 그분이 우리를 배려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家父長)적 옛날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역할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며, 우리를 위해 배려하시는 분이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분의 생명을 이어받아 살겠다는 결심도 들어 있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고치고 살리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루가 6, 36)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이 아니라, 그분 자비의 생명을 우리가 배워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느님에게 가져와 그것을 성취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되고, 그 실천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이 제일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하는 항목입니다. 성숙한 자녀는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부모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녀는 먼저 부모의 뜻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질 것을 빈 다음, 기도는 이어집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는 우리가 노동하여 양식을 얻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빈 말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자각한 우리는 우리가 노동으로 얻은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모든 것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계속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보아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생각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하느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조건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해야만, 하느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서 아버지의 은혜로우심을 이웃과 함께 기뻐한다는 기도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로써 오늘의 기도는 끝납니다. 유혹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인간의 자세입니다. 유혹에 빠진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합니다. 게쎄마니에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루가 22,40).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원하신다면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42). 유혹은 하느님을 생각하지도, 부르지도 않는 삶입니다. 유혹에 빠진 사람은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게쎄마니에서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혹에 빠져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합니다. 그들은 잠들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각자 살기 위해 도망칩니다.




이렇게 기도의 내용을 가르친 예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설명하십니다. 친구를 졸라대는 사람이 가진 친구에 대한 신뢰심과 같은 신뢰심으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긍정적 신뢰심을 설명하는 선언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신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듣게 다시 설명하십니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설명하고, 선언하고, 또 설명하는 예수님의 자세입니다. 그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라고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갇혀서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제대로 된 자녀는 부모에게 신뢰합니다. 노예나 종은 신뢰하지 않고, 주인을 이용하여 득볼 궁리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청할 것은 성령이라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그분의 숨결인 성령이 우리 안에 일하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조르고, 구하고, 문을 두드려서 얻어내어야 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며,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 이 모든 것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큰 신뢰로써 다가가야 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주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아버지로 살아 계셔야 합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계시면, 우리의 삶이 변합니다. 인색한 마음이 관대하게, 또 명예와 허례허식을 탐하던 마음이 섬기는 마음으로 변합니다. 인간은 학문과 예술을 배우기 위해 피 말리는 노력을 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우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실패를 넘으면서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일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실패를 무릅쓰면서도 하느님을 배우겠다는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

 

 

서공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