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보따리

신앙 이야기 | 모녀의 무지개

松竹/김철이 2026. 8. 1. 17:30

모녀의 무지개

 

 

엄마는 화목한 가톨릭 집안을 부러워했다. 우리 집안도 신앙 안에서 뿌리내리길 바랐다. 하지 만 집안의 땅 같던 할머니는 거칠었다. 급한 성미와 강한 기질은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물러설 틈조차 없던 이 집엔 결국 금이 갔다. 엄마는 지쳐 갔지만, 자신을 변화시킨 주님을 믿고 금 이 간 땅에 묵묵히 기도의 씨앗을 뿌렸다.

 

시간이 흐르며 할머니는 급격히 쇠약해졌고, 죽음의 그림자는 노인의 의지를 갉아먹었다. “죽 으면 끝”이란 체념과 함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줄곧 할머니의 입교를 기다렸던 엄마 는 서둘러 대세를 드렸고, 할머니를 교적에 올리셨다. 오랜 고집 끝에 마음을 연 할머니의 첫 순간. 엄마는 눈물로 감사했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엄마는 성모님께 기도했다. “저희 어머니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평화 속 은총의 길로 인도해주세요.” 며칠 뒤, 할머니는 피를 토해 병원에 실려갔다. 엄마는 정신을 다잡고 새벽 빗길을 달렸다. 온 식구가 모였고, 할머니는 “집에 가자!”라며 보챘다. 또 피가 터졌고, 마취할 틈 없이 곧장 수술 했다. 의료진의 분주한 움직임, 요동치는 할머니의 억눌린 비명, 커튼 사이로 그치지 않던 번 쩍거림이 적막한 수술실을 가득 채웠다. 기도 덕분이었을까. 할머니는 수술로 고비를 넘겼다. 중환자실에서 회복하셨고, 이내 차분히 고백하셨다.

 

“나는 캄캄한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공포 속에 지옥, 연옥, 천국을 거쳐온 듯 했다. 신의 존재와 사후세계를 낯선 감각으로 실감했고, 육신은 영혼의 껍데기에 불과함을 느꼈다. 난 부족한 어른 이었다.”

이어 할머니는 큰 상처를 준 첫째에게 용서를 청하고, 서툴지만 사랑한다며 껴안았다. 남은 형제 들에겐 사이좋게 지내라 일렀다. 그러더니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길 위에서, 주님께 나를 이끈 존재가 셋째, 바로 너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비 오는 새벽, 의사의 예고대로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동안 이어진 교우들의 배웅과 미사. 고통 없이 잠든 듯 평온한 할머니 곁에서 성수를 뿌 렸고, 엄마는 할머니의 손에 묵주를 꼭 쥐여드렸다.

 

이윽고 화장터에 도착해서 운구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 가족들의 발치에 선명한 무지개가 드 리워졌다. 비에 젖은 거친 삶 위로 기도의 씨앗이 싹텄다. 모녀의 길 위에 뜬 무지개는 주님의 동행 같았다.

 

죽음은 끝이 아닌 하늘나라의 시작이란 말을 새기며 엄마는 할머니를 보내줄 용기를 냈다. 그 무지개 길을 엄마와 할머니는 함께 걸었다. 길 끝에 이르자, 모녀는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