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보따리

가정 안에서의 환대 | 부모자녀 관계_사랑이라는 이름의

松竹/김철이 2026. 7. 30. 17:30

가정 안에서의 환대 | 부모자녀 관계_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물 한 모금, 밥 한술도 허락하지 않은 채 여드레 만에 숨지게 한 사건은 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 게 만든다.

 

영조는 왕의 혈통을 이었으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라는 사실이 평생 그의 내면 깊숙이 열등감의 씨앗을 심었다. 그는 그 상처를 학문으로 덮으려 했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국정에 임했다. 아들만큼은 흠 없는 군주로 빚어 내겠다는 집념 역시 그 뿌리에서 자라난 욕망이었다. 사도세자가 열다섯살이 되 자, 영조는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맡기고 자신은 뒤에서 지휘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영조의 가르침은 가르침이 아니라 압박이었다. 그는 언제나 아들에게 잘 못만을 골라 지적했고, 여러 신하들이 늘어선 자리에서 아들을 꾸짖으며 그 자 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정답은 오직 아버지의 마음속에만 존재했다. 아무리 헤아려도 그 마음에 닿지 못했던 사도세자는 점차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피하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은 마침내 병적인 방식으로 폭발했다. 옷을 입혀 주던 궁녀들 을 무참히 해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옷을 입으면 아버지 앞에 나서야 했기에, 그는 그 순간 자체를 온몸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이는 아들인 사도세자의 잔인함 이 아니라, 극도로 억눌린 인간이 마지막으로 내뿜는 절망의 신호였다.

 

영조는 끝내 그 신호를 읽지 못했다. 분노 속에서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자물쇠 를 채웠다. 사도세자는 그 좁고 어두운 상자 안에서 여드레 만에 숨을 거두었다. 더욱 비통한 것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영조가 슬픔을 토로하거나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았다는 기록이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는 끝내 자신이 ‘올바른 아버지’였다고 믿으며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이 비극이 단순히 과거의 일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상담실에서 매일 이와 닮은 부모와 자녀를 마주한다. 자녀의 잘못만을 열거하면서 정작 자신 은 피해자라 여기는 부모들. “잘 키우고 싶을 뿐”이라는 말 뒤에 얼마나 깊은 통 제의 욕망이 숨어 있는지, 그들은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다.

 

자녀는 타인이다. 같은 피를 나누고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들, 자녀는 결코 부모 의 소유가 아니다. 자녀가 스스로 설 수 있게 되는 순간, 부모는 한 발짝 물러서야 한다. 부모는 자녀 인생의 설계자가 아니라 지킴이다. 성인이 된 자녀에게 여전히 이래라저래라 방향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숙함이다. 그 시점부터 부 모의 역할은 단 하나다. 멀리서 바라보며 “너는 잘 해낼 수 있다”라고 믿어 주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녀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하려는 생각은 사랑의 언어를 빌린 집착이다. 자녀 가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양육이다. 자녀 를 바라보며 불안해지는 마음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불안은 자녀의 문제가 아 니라, 부모 스스로 다스려야 할 감정이다. 방관이 답은 아니지만, 끊임없는 간섭 역시 답이 아니다. 진정한 관심은 믿음의 형태로 전해질 때 비로소 자녀의 가슴 에 와닿는다.

 

만약 영조가 내게 상담을 청해 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멀 쩡한 아들을 무너뜨린 것도 당신이며, 그 어떤 이유로도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노비의 자식이라는 열등감은 아 들이 훌륭해진다고 해서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고. 그 상처는 오직 자기 자신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몫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