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사제 단상 | 개와 늑대의 시간

松竹/김철이 2026. 7. 8. 10:00

좋다고 말하는 사람

 

 

박정민 배우는 저서인 『쓸 만한 인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전공에 있어서는 관대한 시각을 갖기가 대부분 어렵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 레 틈을 찾고 흠을 찾는다.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이건 이래서 좋다.’보다 ‘이건 이래서 별로다.’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별로인 게 적으면 좋은 거고 별로인 게 많으면 그야말로 별로인, 가히 네거티브한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깐깐해지고 재수 없어지더라는 거다.”

 

위의 글을 읽으며 적잖이 뜨끔했다. 사제로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동료 사제들과 교우들을 가장 많 이 만난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할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둘러보면 화가 많은 사람이 참 많다. 사람들은 배우의 말대로 ‘좋은 점’보다 ‘별로인 부분’에 집중하며 세상을 바라본다. 특히 신앙생활과 관련해서는 가히 ‘전공자’라고 할 만한 이들이 교회와 성직자를, 성직자는 교우들을, 나 아가 서로가 서로를 날카롭게 평가하는 모습을 보면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물론 그 비판과 비난이 나를 향할 때도 있다. 언젠가는 대화 중에 교회의 가르침, 규정에 따른 기준 이 무엇인지 이야기했다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라떼는 그렇지 않았는데’라며 왜 그런 기준 을 지켜야 하느냐고 화를 내는 상대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이건 이래서 별로다’라는 강력한 무기 를 들고 다가오는 상대방과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대화는 이미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가만, 가리 고 돌렸지만 결국 비판에 가까운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나 역시 깐깐하고 재수 없어 보인다.)

 

시간이 흐르며 아는 것도 많아지고 경력도 쌓이고 있지만 오히려 마음은 더 좁아진 듯하다. 그래서 점점 더 깐깐한 기준으로 타인과 나를 옥죄고는 한다. 그렇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받아들이던 때를 그리워하게 된다. 물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이유도 없다. 아는 것이 많아지고 연륜이 쌓일수록 오히려 깊이와 너그러움을 갖춘 훌륭한 분들도 주변에 많 지 않은가! 비록 예전의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성숙한 너그러움을 배우며 좋은 사 람이 되고 싶다. 율법의 진정한 전공자셨던 예수님께서 율법보다 사랑을 앞세우셨듯, 나 역시 사랑의 크기를 키워가며 ‘이건 이래서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넉넉한 사제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