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김철이
가난은 결코 죄가 아니다. 조금 불편할 따름이다. 매일매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화려한 삶만 살 것 같은 연예인 중에는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스타도 있지만, 데뷔 전 찢어지게 가난했으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가난을 딛고 서서 자수성가한 연예인도 적지 않다. 가난한 시절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 성공한 스타도 숱하다.
이십여 년 전 경상북도 점촌엘 이년 여 머물러 생활했는데 저녁 식사 후면 한가로움을 틈타 잦은 저녁 산책을 즐겼다. 포장되지 않은 시골길을 휠체어 걸음으로 어눌하게 걷노라면 여름 티를 드러내는 오월의 끝자락은 보리밭이 출렁였다. 보리밭을 보니 과거 농촌 살림의 어려움이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196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농촌의 버거운 살림살이는 하루가 천년처럼 느껴지는 시기였다. 이때쯤이 가장 어려운 보릿고개였으니 초봄부터 나물로 연명하다 오월에는 송피(松皮)를 벗겨 허기를 때우던 시절이 있었다.
종다리가 시끌벅적대는 보리밭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지만, 보릿고개의 이야기는 수백 년 전의 전설이 아니라 사십여 년 전의 우리의 자화상이다. 지금은 넘쳐나는 영양으로 다이어트 성공담을 아침 방송에 자랑삼아서 하는가 하면 남은 음식 처리를 걱정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네 살림살이다. 보리밭 어귀에 오르면 허기진 북한 동포가 절로 생각났다. 북한의 식량은 이미 바닥이 났다는 오래전 소식이다. 어느 노시인은 “아이가 울고 있다. 배가 고파서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라고 그의 시 ‘보릿고개’에서 슬퍼한다. 에 썼듯이…
옛날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강물이 몇 배로 불어났다. 강기슭 사람들은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야 했는데 때를 만난 듯 뱃사공은 뱃삯을 세 배나 올려 서푼씩 받았다. 마침 강을 건너려던 가난한 선비는 지닌 돈이 달랑 두 푼밖에 없었다. 선비는 뱃사공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사공 양반!, 미안하게 됐소. 지닌 돈이 두 푼밖에 없소이다. 한 푼이 모자라는데 좀 태워주시오.” 뱃사공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선비는 끝내 배를 타지 못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내 배가 손님을 가득 싣고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산더미처럼 밀려온 사나운 물결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만 뒤집히고 말았다. 배손들은 물론 뱃사공까지 물에 빠져 모두 죽게 되었다. 이 광경을 나루터에서 바라보던 선비는 이렇게 탄식했다. “사내로 나서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한 탓인지 난 돈 한 푼이 모자라서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네,” 현대를 사는 이들은 지닌 재물이 많아 오히려 화근을 만드는 이들도 숱한데 가난한 것이 늘 불행한 것만은 아니리라는 것을 깨우쳐야 할 터
내 나이 서른아홉 되던 해 이른 봄날, 주거지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 겸 문학 스케치를 나갔다. 공원 놀이터엔 예닐곱 돼 보이는 또래의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기들이 되고 싶은 것들로 변신하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여 앉은 아이들이 자기의 꿈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내 어린 시절 꿈꾸던 추억 몇 자락을 보는 것 같아 어느새 마음이 흐뭇해졌다. 아이들은 제각기 되고 싶은 대상을 조잘대며 말했다. 그런데 한 남자아이가 한참을 말없이 쪼그리고 앉아 애꿎은 모래만 뒤척거렸다.
“야! 넌 뭐가 될래?” “빨리 말해, 궁금하단 말이야.” 다그치는 친구들의 성화에 뭔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서더니 햇볕이 잘 드는 놀이터 어는 벽으로 뛰어가 기대서는 것이었다. “얘들아! 난 햇볕이야, 너희도 모두 이리로 와봐.” 어리둥절해하던 아이들은 금세 달려가 그 남자아이 옆에 나란히 늘어서서 외쳤다.
“와~ 따뜻하다!.” 그 이후 나는 가끔 놀이터로 들러 노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제공하곤 했다. 아울러 무심결에 햇볕이 되고 싶어 했던 아이에게 왜 햇볕이 되고 싶은지 그 이유를 물었다.
“우리 할머니는 동네 시장에서 생선 장사하시는데요. 할머니가 앉아 생선 좌판을 펼쳐놓고 장사하시는 곳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아요.” 아이는 추운 겨울 잠시 잠깐만 할머니를 비추고는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햇볕이 얄미웠던 것이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따뜻한 햇볕이 되어 젖먹이 때 교통사고로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줄곧 새선 장사로 어린 손자를 기르시는 할머니를 온종일 따뜻하게 비춰 줄 거라고 했던 것이었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아이의 고사리손을 꼭 잡아 주었는데 마치 햇살을 잡은 듯이 마냥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어른들도 어린 시절엔 각자 다른 꿈들을 꾸며 장래 희망을 키웠을 것이다.
우연히 그 아이를 만나 인연을 맺은 시간은 다 합쳐 불과 이 주일여 밖에 안되지만, 티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따뜻했던 그 아이의 심성을 통해 얻고 쌓았던 문학적 재산은 고희의 나이를 먹은 지금도 쌓여가는 듯싶다. 또 한 해의 겨울이 두꺼운 외투로 갈아입고 온 누리에 퍼질러 놀 이즈음 겨울을 맞이하는 모든 이가 햇볕이 꿈이었던 그 가난한 아이의 꿈처럼 따뜻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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