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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2025 03 18

松竹/김철이 2025. 3. 18. 07:00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 2025 03 18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d2FFH28o76A

 

 

 

2025년 나해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나폴레옹은 종교가 가톨릭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황제’라는 칭호를 가지고는 보통 왕관을 씌우는 의식은 교황이 주례를 맡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스스로 왕관을 씌우며 자신이 모든 권력의 근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황제란 자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노력을 이룬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의 황제 즉위 후, 그는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정복하고, 자신의 황제 권위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리한 전쟁은 결국 패배와 몰락을 초래하게 됩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의 패배는 그가 칭호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결과로, 그의 군은 대패했고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1814년,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엘바 섬으로 유배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죽기까지 가톨릭 신앙을 주장했지만, 자아를 누르지 못하는 그냥 종교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종교가 그 사람을 바로잡아주었던 예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본래 깊은 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청년 시절 링컨은 오히려 의심과 회의 속에서 살아갔고, 성경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적으로 여러 번 실패를 겪고, 개인적으로도 가족의 죽음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으며 방황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이후, 남북전쟁이라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닥뜨리자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국가가 분열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링컨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의 막중한 책임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부담감은 그의 내면에 깊은 신앙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고, 특히 전쟁 기간 동안 시편과 복음서의 구절들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전쟁의 무게와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질 수 없음을 느끼고 점점 더 하느님께 의지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겸손해지고, "나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에 서 계신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섭리를 정치적 결단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또 이같은 신앙으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는 “하느님 아래 새로운 자유가 탄생하도록,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합시다.”라는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결국 링컨에게 종교는 단순히 개인의 위안이나 심리적 안정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으로서 역사적 결정을 내릴 때 도덕적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통령 이전의 링컨이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회의적이었다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고 의지하는 신앙의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깊어진 관계가 링컨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자, 노예제 폐지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 있을 때는 부하 병사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며 가장 앞장서서 적과 맞서는 용맹하고 현명한 지도자였지만, 평화가 왔을 때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되고자 했고 점점 독재자의 모습을 띠었고 공화정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국민 영웅인 그를 암살하였습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거나 칭호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좋은 모습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악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려는 지에 대한 그 뜻에 달려있습니다. 그 사람이 섬기는 ‘신’ 때문입니다. 자아를 섬기는 사람은 자아가 원하는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선한 신을 믿고 지향하는 사람은 그 모습이 되어갑니다. 사울 왕이 왕이 되고 점점 나빠졌던 이유는 자아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윗이 왕이 되어 점점 겸손해진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를 형성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교만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고 하시고,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아버지만을 스승으로 부르시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불려지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불리셨고, 또 제자들을 “아이들아!”(요한 13,33: 21,5)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데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만큼 겸손하셨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아무리 위치가 바뀌더라도 그것들은 다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정체성을 더 확고하게 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신앙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아를 섬기기에 자리에 따라 자기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인을 뽑을 때는 그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겉모양의 종교가 아닌 참으로 섬기는 신이 어떤 신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직 신만이 그 사람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의 지위에 따라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신이 되려는 존재기 때문에 자아를 누를 수 있는 분은 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육.마.를 누르지 못하면 자신이 믿는 신은 그 사람 안에서 아직 신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