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분의 1
저는 어머니 덕분에 유아 세례를 받고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주일 미사를 거르는 건 ‘죽을죄’와 맞먹는 일이라 여기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명분 이 생겼습니다. ‘대한민국 현실상 고3이 성당에 다니는 건 불가능한 거 아시죠? 이해 못 하시겠으면 대학에 떨어트 리시고 이해하시겠으면 대학에 붙여주세요.’ 지금 생각하 면 참 뻔뻔했다 싶지만, 당시에 저는 그렇게 주님을 당당 하게(!) 떠났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저를 대학에 붙 여주셨지만 저는 은혜도 모르고 대학생이 된 1995년부터 2009년까지 주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2009년은 저에게 참 힘든 해였습니다. 누군가 이 고통 에서 나를 끄집어내 주길 바랐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만 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더 외로웠고 더 무서웠 습니다. 그때, 성당을 찾았습니다. 고해소에 들어가 얼마 나 오랜만에 성당에 왔는지를 말했더니 신부님께서는 말 씀하셨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형제님이 돌아온 것을 우 리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기뻐하실 거라고요. 힘드니까 이제야 당신을 찾는 부끄러움과 사람에게서 받을 수 없었 던 주님의 따뜻한 환대와 위로가 느껴졌습니다. 그날, 미 사 내내 주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 례 내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빛으로 다가와 제 안의 모든 어둠을 흘려보내는 듯했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지금 까지 저는 주일을 거른 적이 없습니다. 일주일인 168시간 중에 단 1시간! 미사 시간만큼은 되찾은 아들처럼 주님께 달려갑니다. 수학적으로 봐도 엄청난 이익이 아닐 수 없 습니다. 168분의 1만 투자하면 나머지 167마저 꽉 채워 지니까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의 168분의 1이 진짜 168분의 1일까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학원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똘망똘망한 눈으로 제 이 야기를 듣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저 부모님이 보내서 억 지로 앉아 있는 아이들을 수없이 봅니다. 몸은 여기 있지 만 정신과 마음은 여기 없는 아이들은 답답함에 몸부림치 거나 그냥 잠을 자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곤 합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네가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게 무슨 소용이니?’ 괴로워하는 아이 들을 보는 제가 더 괴로울 지경입니다. 어쩌면 이 시선이 미사 시간에 저를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이 아닐까 생각하 곤 합니다. 뜨겁게 눈물 흘리며 드리던 미사는 어디 가고 어느 순간부터 습관적으로 미사를 드리고 있는 저를 보면 주님께서는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주님도 똑같이 제게 말씀하실 것만 같습니다. ‘네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게 무슨 소용이니?’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미 있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정말이지 애타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 니다. 그러니 168분의 1이라도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 안 에서 주님 뜻을 발견할 수 있고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믿 습니다.
글·구성 서희정 마리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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