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명과 순종
이계철 라파엘 신부님(주교좌 기도 사제)
성직자 신분의 시작인 부제 수품 전, 대품 피정 마지막 에 성직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을지 주교님과 면담을 하 고, 서약서에 서명을 합니다. 당시 교구장님이셨던 김수 환 추기경님께서 저의 수품 면담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추기경님께서 하신 질문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 다. “자네는 이제 성직자로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될 터인데, 마음의 결심을 하였고 잘 지킬 수 있겠는가?” 이어서 순명과 독신 서약서에 서명을 하면서, 저는 저의 부족함을 주님께서 채워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저 는 아직도 ‘채워진’ 성직자가 아니라, ‘부족한’ 종입니다. 그러면서도 여태까지 사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주님 사랑과 자비는 끝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에 앞서, 여 러 가지 규칙을 말씀하십니다. 맹수와 강도를 물리칠 지 팡이와 돌이 많은 땅을 걸어갈 때 필요한 신발 말고는 아 무것도 몸에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옷을 두 벌 껴입는 것도 거추장스럽고 사치한 모습이니 그러지 말라고 하십 니다. 거기에 더 보태서 마음에 드는 좋은 집을 찾아 다니 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뜻은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라는 것입니 다. 가벼운 몸가짐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라는 가르침 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보살핌과 안배에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오직 근 본에 충실했고,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 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며,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위로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도 듣지 않으면, 앙갚음이나 해코지하 지 말고 다만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기만 하라고 하십 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하였고 또한 ‘순종’했다고 생각합니다. 순명이 마땅 히 옳게 따르는 것이라면, 순종은 부족한 것을 모두 채워 주시고 도와주시겠다는 염려와 보살핌을 받아들이고 이 끌려 가는 것입니다. 순명을 통해 선포자로 파견된다면, 순종을 통해 목자 곁에서 사랑받는 양으로 이끌려 갑니 다. 순명이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면, 순종은 엠마오로 가 는 제자의 가슴 뜨거운 주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파견 당부 말씀은 결코 내던짐이 아닌, 지극한 사랑에로의 초대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족합니다. 하느님만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이고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저는 순명을 서약했지만, 주님께 순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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