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그 무렵 | 김동영 라파엘 신부님(청라 본당 보좌)

松竹/김철이 2024. 1. 5. 10:02

그 무렵 

 

                                                              김동영 라파엘 신부님(청라 본당 보좌)

 

 

그 무렵. 확신하기에 참 모호한 시간입니다. 알 것 같지만 아직 풀리지 않고 감추어진 물음들로 인 하여 주저함과 망설임이 남아있는 시간, 여지를 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낸 사건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주님 공현 대축 일도 한 편으로는 그런 것만 같습니다.

 

성탄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아 무엇이 꿈이고 무 엇이 현실인지 그 경계가 흐릿한 그 무렵입니다.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고 곧이어 연중시기를 맞이 해야 하는 그 무렵입니다. 이미 깨어 기다려온 아 기 예수님을 마침내 만나 뵌 기쁨과 다시 새롭게 한 해를 살아내야 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 은 막막함이 공존하는 그 무렵입니다.

 

그 무렵에 우리는 떠오른 주님의 별의 인도를 받 아 아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동방 박사 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마음도 우리와 다르지 않 았으리라 묵상하게 됩니다. 땅을 밟고 있지만, 하 늘을 바라보며 별을 연구하는 데에 온 생을 바친 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본 적이 없고 자신들을 놀 라게 한 별을 발견합니다.

 

마침내 기다려온 별이 솟아올랐다며 그 길로 부 푼 꿈을 안고 별빛을 따라나섭니다. 밤을 새우며 별이 인도한 길 끝에 다다른 박사들이 마주한 것은 초라한 구유에 뉘어 있던 한 아기를 품고 있는 어 머니와 아버지, 지극히 보통의 평범한 현실이었습 니다.

 

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박사라고 불리 고 심지어 왕이었다고 전해지던 그들의 반응이 우 리를 놀랍게 하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침묵을 뚫고 당혹스러울 법한 마음을 가다듬어, 새근새근 자는 아기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고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섣불리 단정 짓지 않고 실망하며 돌아서지 않습 니다. 가장 놀랍고 위대한 꿈이 가장 작고 연약한 아기에게서 드러난 현실을 자신들의 삶 속으로 받아들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그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 를 허물며, 사라지지 않을 인류의 빛을, 구원의 기 쁜 소식을, 말씀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생의 한가운데에서 새롭게 맞아들이며 살아가라고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로 우리에게 무언의 말을 건넵니다.

 

벅찬 감동과 기쁨, 동시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 이 혼재한 것이 우리네의 지극히 보통의 평범한 현 실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놀랍고 위대한 하느님의 꿈이 작고 연약한 나를 통하여 실현되어 갑니다. 우리가 기뻐하며 바라보고 따라나섰던 별은 아기 예수님을 모신 우리 마음 한 켠을 계속해서 비추고 있을 겁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알린 별이 이제 제 할 일을 마치고 나서 잊히고 사라질까 길을 잃을까 불안하기도 하겠지만, 감추어져 있던 진실은 이젠 우리가 그 별의 몫을 나누어 전해 받게 된 것입니 다. 새로이 맞게 될 시간과 삶 속에서 사람들을 예 수 그리스도라는 길로 초대하고 함께 걸어 나가도 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렵은 신비롭고 이토록 믿음 위에 굳건히 자리한 시간이자, 우리에게 오늘이 될 시간 입니다. 성탄도 공현도 오늘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 됩니다. 나를 통해 오늘, 온 세상에 하느님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하느님의 꿈이 나의 현실에 서 꽃핍니다.

 

하느님의 오늘이 나의 오늘이 될 그 무렵, 주님 께서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