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간 소통

말씀의 이삭 | 이끄심에 대한 응답

松竹/김철이 2023. 10. 10. 11:37

이끄심에 대한 응답

 

 

찬미 예수님! 백번을 생각해 봐도 제가 지금껏 살아오면 서 유일하게 잘한 일을 꼽으라면 하느님의 아들로 살다 죽 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의 선택 이라기보다는 ‘이끄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인간이 가 혹한 운명 앞에서 완강한 저항을 멈추고, 기력을 완전히 소 진했을 때, 하느님의 숨은 계획이 드러난다고 하죠. 사형선 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일 때였습니다.

 

어느 날 종교 담당 교도관님의 권유로 천주교 교정사목 위원회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계신 어머님들을 만나기 위 해 천주교 상담실에 들어섰습니다. 오랫동안 사형수들을 만나오신 어머님들 세 분이 기다리고 계셨는데, 그중 한 분 이 고(故) 김자선 엘리사벳 어머니셨습니다. 처음 만나는 자 리였는데, 거부감 없이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받았습니 다. 사실 만나기 전 종교인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성경 이야기를 하면 어 쩌나 하고 내심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들은 골치 아 픈 성경이나 종교를 강요하는 듯한 말씀은 일절 하지 않으 셨고, 대신 맛있는 밀크커피를 한잔 타 주시고 토닥이며 위 로의 말을 건네주셨습니다. 어머님들은 그 순간 저에게 필 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앉은 자리 맞은편 벽면에 눈길을 잡아끄는 그림 한 점이 걸 려있었습니다. 바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였습니다. 누 더기가 되어버린 옷, 벗겨진 신발, 세상이 무너진 듯 무릎 꺾인 뒷모습에 떨어지는 빛이 저를 비추고 있는 듯했습니 다. 그리고 어깨 위로 올려진 양손과 인자한 아버지의 얼굴 은 제 앞에 앉아있는 어머님들과 닮아 보였습니다. 그날 본 어머님들의 첫인상은 제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얼굴이었고,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분들 같았습니다.

 

상담실을 나서려는데, 고(故) 김자선 엘리사벳 어머님이 수갑 찬 제 손에 책 한 권을 쥐여 주셨습니다. 《프란치스 코의 생애》라는 책이었습니다. 방에 돌아와 대충 훑어보 니 딱 봐도 머리 아픈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이런 생 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에 그분들을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데, 예의상 한번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별생각 없 이 읽기 시작한 성인전은 어두운 제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되어 들어왔고, 그해 겨울 저는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 로 새로 태어나 두 번째 생을 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임종이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자신을 처형장이었던 ‘죽음의 언덕’에 묻어달라고 유언합니다. 예루살렘의 처형 장이었던 골고타 언덕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최후까지 닮 고 싶었던 걸까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가장 남루한 곳 으로 내려가 온전히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자 했던 저의 주 보성인을 본받아, 저도 몰락의 밑바닥인 감옥에서 그리스 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도로 살고 싶습니다. 샬롬!

 

*최고수는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은 이를 구치소에서 일컫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