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 내 자리 있나요?
놀이터에 가보면 이미 놀이를 시작한 아이들 무리가 있고 뒤늦게 도착해 무리에 끼고 싶은 아이가 있 기 마련이다. 아이는 무리에 끼기 위해 자신이 갖고 온 젤리나 과자를 내밀기도 하고, 숨바꼭질 술래 에게 ‘걔네 저쪽으로 갔어.’ 하고 살짝 귀띔해주기도 한다. 뛰다가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세우면서 자 연스레 같이 뛰어가 놀이에 합류하는 아이도 있다.
인간의 삶은 경계선 안에 들어가려는 투쟁의 연속이다.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어 떤 계층에 진입하기 위해, 선망하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느라 힘을 다 써버려서 하느 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던 어느 날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문을 열고자 하는 것이 우르르 무너질 모래성인가, 튼튼한 바위 성인가?’ ‘반석 위에 지은 하느님 나라에 날 위한 자리 가 있을 것인가?’ 하느님 나라에서 보내온 가상의 초대장을 상상하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받을 수 있 을까 고민한다.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초대장의 수신인이 되는 건 아니다. 기도와 함께 자선이 병행될 때 하느님 나 라에 우릴 위한 자리가 만들어진다. 유튜브 영상 시작 전에 나오는, ‘위기에 처한 누구누구를 도와주 세요.’ 하는 광고를 보고 정기후원을 신청했을 때, 미사가 끝나고 모금 활동을 온 이주민 노동자 단체 에 후원금을 이체했을 때, 나는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아직 충분하진 않지만 애덕을 실천하는 횟수 가 더해질수록 하느님 나라에 있는 내 좌석이 조금씩 완성되리란 안도감이다.
놀이터의 아이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어떤 무리에 끼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아베 피에르 신부도 자신의 저서 <단순한 기쁨>에서 말하 지 않았던가. 한평생 자신의 손으로 가난한 이들의 손을 잡고자 애쓴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비로소 자신의 다른 쪽 손을 잡아주는 하느님의 손을 느낄 수 있다고. 가난한 이들의 손을 잡는 방법으로써 고작 얼마의 돈을 후원하는 것이 전부였던 나를 돌아보다가 문득 한심한 질문을 던져본다. ‘내 몫의 삶을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왜 꼭 자선을 베풀어야 하나. 각자 알아서 잘 살면 되지 않나.’라고.
그 대답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에서 하느님의 잔치가 열리기 때문이라는 것. 잔치를 베풀려거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 라.”(루카 14,13)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다. 끼어들고 싶은 잔치가 있다면 잔치의 주인공이 누군지 살펴보고 주인공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가난한 이와 장애인, 소외된 이들에 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유다. 자선을 실천하는 마음가짐이 힘들었는가? 아주 훌륭하다. 내 재물을 내놓는 게 아깝고 외로운 이를 찾아가는 게 내키지 않았음에도 일단 그렇게 했다면 두 번째, 세 번째 에선 점차 기쁘게 할 수 있다.
파라다이스의 어원은 ‘울타리로 둘러쳐진 땅’이라고 한다. 나의 낙원은 하느님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있다.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나는 오늘 무엇을 내놓았는지 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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