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윤원진 비안네 신부님
내일 복음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나는 방금 배달음식을 시켜먹었다. 엄마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가셨고 나는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 지친 몸으로 배달어플에서 메뉴를 골랐다. 호기롭게 저녁은 내가 알아서 먹겠노라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플에 올라온 별점과 리뷰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음식이 올 때까지 저녁기도를 하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서서 도착한 음식을 펼쳤다. 맛이 없었다. 분명 별점도 높고 리뷰도 많았는데 말이다. 음식점의 주인이 손으로 적은 '맛있게 드셨다면 리뷰 부탁드립니다. 만두 두 개 서비스로 드립니다'라는 쪽지가 보였다. 세 개도 아닌 두 개의 만두 서비스에 감동이 사라졌지만 직접 손으로 적은 글씨에 보답하고자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글을 쓴 후 별점 5개를 주었다.
배달음식을 다 먹은 내 심정이 내일의 말씀을 읽은 소감과 같다. 배달어플에서 유명한 맛집이라고 해서 주문했는데 도무지 맛이 없는 배달음식처럼 내게 배달되어온 내일의 복음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의미도 주지 못하였다. 내 배가 불렀기 때문일까, 너무 기대가 높았던 것일까. 복음의 해설자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호기롭게 나 혼자의 힘으로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큰소리친 탓일까.
내가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묵상이 안 되는 것일까. 너무 피곤하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럴 때는 다른 사람의 강론을 커닝하고 싶은 유혹도 든다. 하지만 이는 배달음식을 먹은 다음 다른 사람의 리뷰를 베껴 쓰는 것과 같아서 읽는 이에게도 주인에게도 미안해질 따름이다.
음식이 식더라도 저녁기도를 마저 할걸 그랬나보다. 하지만 제자들이 즉 안식일에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처럼 그분께서도 나의 배고픔을 이해해주시지 않았을까. 배고픈 다윗도 사제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빵을 먹었는데 말이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지 않았느냐?
내가 이 강론을 쓰는 이유는 배달음식을 만들고 손편지까지 쓴 주인의 정성 때문에 리뷰를 남긴 것과 비슷하다. 그분은 내일의 말씀을 주시며 '맛있게 먹었으면 복음에 대한 너의 리뷰를 신자들과 나누어라'라고 속삭이시는 듯하다. 하지만 어쩌랴. 아무 맛도 모르겠는걸... 그래서 이렇게 솔직한 리뷰를 남긴다.
내가 함부로 그분의 요리에 별점을 매길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분의 요리는 언제나 맛있었고 내게 힘을 주셨다. 게다가 오늘은 강의도 잘된 듯 하여 만두 두 개를 서비스로 받은 듯하다. 그래도 도무지 맛을 알 수 없는 주인의 요리 앞에 난감하기만 하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내가 어찌 주인의 레시피를 알 수 있겠는가. 사장님에게 레시피를 묻는 것이 실례인것처럼 나의 주인에게도 차려준 음식의 의미를 묻고 싶지는 않다. 다만 맛이 없는 날도 있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복음도 있다. 볶음우동을 시켜먹고 읽은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도 어렵기만 하다.
과연 내 강론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힘과 능력으로 한 강론이었다면, 그 강론의 주인이 나였다면 원하는 때에 하고 싶은 만큼 쓸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떤 날은 준비가 덜 되었는데도 좋은 결과가 있고 어느 날은 한껏 준비를 했는데도 원하던 결과를 보지 못한다.
나는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분의 말씀과 내일 주실 하루에 별점을 매길 수 없다.
다만 그것을 주신 주인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게 되기를...
P.S.
내일 복음 배달받으신 분들의 리뷰를 기다립니다. 여러분의 복음리뷰는 게으른 사제의 묵상에 큰 힘이 됩니다.
결코 컨닝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 입맛이 이상한 것일 수 있으니 내일 복음 맛있게 드신 분이 계신다면 부디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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