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윤원진 비안네 신부님

松竹/김철이 2021. 9. 3. 00:00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윤원진 비안네 신부님

 

 

오늘도 엄마에게 짜증을 내었다.

아무래도 내가 피곤했었나 보다. 짜증낼 일도 아니었고 엄마가 하루 이틀 그런 것도 아닌데 그냥 짜증이 났다.

내가 짜증을 내면 엄마는 조용히 내 눈치를 본다. 내가 짜증을 낸다고 같이 짜증을 내지도 않고 짜증내는 나를 나무라지도 않는다. 그저 폭풍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어부가 먼바다를 바라보듯 내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오늘 아침에는 장례미사를 드렸는데 고인이 65세였다. 76세인 우리 엄마도 언제나 늘 내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엄마와 '함께 있는 동안' 짜증을 내지 말아야겠다. '함께 있는' 시간이 언제까지일런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언젠가 내가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인 엄마를 그분께 돌려드려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오늘처럼 짜증냈던 순간들을 한없이 후회하며 단식할 것이다. 밥을 먹어도 엄마가 차려주던 음식이 생각나 넘어가지 않을 것이고, 배가 고파도 '엄마! 밥 먹자'하고 부르던 때가 생각나 먹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 목이 메인다. 그렇다고 미리 슬퍼할 수는 없으니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단식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을 살아야겠다. 엄마가 담근 김치만 있으면 김치와 밥만 먹어도 혼인잔치처럼 풍성하고, 내가 잘 먹는 모습이 혼인잔치에 차려진 진수성찬이라도 되는 듯 내 얼굴을 반찬삼아 밥을 먹는 엄마이다. 그런데도 왜 나는 엄마에게 짜증을 내는 것일까. 

 

누구나 화를 내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라도 화를 낼만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어디에선가 읽은 것이 기억났다. 나도 짜증을 낼 때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오늘도 준비시간이 오래걸려 늦게 나오는 엄마를 차에서 기다리다 짜증을 내었고, 나는 출발시간을 미리 말해주었으니 엄마가 그 시간에 늦지 않았으면 내가 짜증을 안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였다. 짜증과 울화의 속성은 팔에 맞는 주사와 비슷해서 한참 후에 아프다. 짜증을 내는 순간에는 멈출 줄 모르다가 감정을 다 쏟아낸 후에야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이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엄마는 76년을 이렇게 살아왔다. 엄마도 꿈많은 소녀였을 것이며, 놀기 좋아하는 아가씨였을 것이다. 갓 결혼한 새댁이었을 것이고, 첫 아이를 낳은 초보엄마였을 것이며,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어느덧 훌쩍 커버린 아이에게 놀라던 학부모였으리라. 그 아이를 대학에 보내며 엄마는 더 아껴써야겠다고 결심했을 것이고 아이가 받아온 졸업장이 당첨된 복권이라도 되는 듯 흐뭇해하였다.

이런 엄마는 나를 위해 '헌 가죽 부대'가 되었다. 엄마도 꿈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은 '새 가죽 부대'였던 시절이 있었을텐데 70년을 훌쩍 넘기며 꿈이었던 포도주는 추억이 가득 담긴 '묵은 술'이 되었고 그 술을 담았던 몸과 마음은 '헌 가죽 부대'가 되었다. 이런 엄마에게 나의 기준을 내세워 짜증을 내는 것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엄마가 내게 너무 맞추려하다보면 그것은 무리가 되어 엄마를 힘들게 할 것이고 나에게 맞춰주려 애쓰는 엄마를 바라보는 나 역시도 편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반성하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엄마의 생일이었다... (나는 욕먹어도 싸다... 모든 비판을 받아들이겠다..)

 

내일은
헌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지 않게 하소서.
나의 기준과 기분을
나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들에게
강요하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