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배반자를 뽑으셨다|윤원진 비안네 신부님

松竹/김철이 2021. 9. 7. 09:50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배반자를 뽑으셨다

 

                                                                         윤원진 비안네 신부님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 배반자를 뽑으셨다.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갑자기 뽑으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왜 굳이 배반자 유다 이스가리옷을 사도로 뽑으셨을까.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하리라는 것을 알고 뽑으셨을까. 아니면 모르셨을까.

그분은 사람의 속마음을 모두 아는 분이시니 모르셨을 리는 없는데, 그렇다면 굳이 왜 사도로 뽑으셨을까.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요한 2,25)

만일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위해 배반할 사람이 필요했다면 유다를 이용하신 것이 된다. 또한 최후의 만찬에서 굳이 유다에게 배반을 예고하실 필요도 없었다. 유다의 배반이 예정되어있었고 그 배반조차 그분의 계획이셨다면 말이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루카 22,21)

어쩌면 그분께서는 유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셨던 것이 아닐까. 유다는 배반하기 위해 뽑힌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배반을 선택한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언제부터 배반할 생각을 가졌을까. 그도 사도로 뽑혔을 때는 예수님을 성실히 섬기고 복음을 전파할 꿈을 품었으며 그분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사탄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갔다.(루카 22,3)

루카복음에 따르면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가 배반할 마음이 생겼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배반할 마음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정말이지 유다에게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셨다. 십자가의 수난은 그분에게 예정된 것이었다.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루카 22,22)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십자가의 수난은 정해져있었어도 유다의 배반은 정해지지 않았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배반이 정해져 있었다면 배반을 말리는 것처럼 유다에게 경고하실 필요도 없었고,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가서 배반하게 된 것이라면 그 전에는 배반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 된다. 아니면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이 들어간 것일까.

 

성경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고 있다. 

이와 비슷한 질문이 '하느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꾐에 넘어가리라는 것을 모르셨단 말인가? 아예 만들지 않으셨으면 선악과를 따먹을 일도 없지 않았는가

그랬더라면 우리는 낙원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부들은 아담의 죄로 인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으니 이를 '복된 죄' 혹은 '복된 탓'이라 한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그렇다면 유다의 배반도 '복된 탓'이란 말인가.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께서 못 박히시고 우리는 그 수난 공로로 구원을 얻었으니 말이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이럴 때는 누군가 나에게 '그냥 믿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답을 주지 않고 있으니 나처럼 의심 많은 사람이 고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유의지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다 (자유의지론 제3권)

'악은 선의 결핍'이므로 '선'이 부족한 것이 '악'이므로 '악'이라는 존재는 '무(無)'인 것이다. '없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알 수 없다. '침묵을 들을 수 없고, 어둠을 볼 수 없듯이' 말이다. 다시말해 인간은 악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선을 보충하지 못한 것이다.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선이 결핍되었는데도 모르고 살다가 끝내 스스로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

이런 입장에서는 '선악과를 왜 만드셨을까'라는 의문에 답을 얻을 수 있다. '아담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만일 아예 선악과가 없었더라면 아담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악을 택하지 않도록 강요된 것일 수 있다.

 

조금 야한 이야기이지만 내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는 '성기능 검사'를 하였다. 일생 독신으로 살 사람에게 왜 이런 검사를 하는지 의아했지만 곧 알게 되었다. 만일 성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사제가 되려는 사람은 '도피'인 것이다. 기능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못해서' 할 수 없는 것은 의미가 적다.(너무 야한 얘기였나 보다... 그래도 이 비유가 가장 적절한 듯하다)

 

이제 유다로 돌아가 보자.

유다의 배반은 예정된 것이었는가, 아니었는가.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유다의 배반은 유다의 '자유의지'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가라지의 비유'이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주인은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오 13,28-30)

주인은 가라지가 밀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둔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유다가 배반자가 되리라는 것을 그분은 알고 계셨지만 유다의 배반을 막으려다 유다가 가진 장점도, 가능성도 제거되기를 바라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유다가 배반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혹은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회개하여 마음을 다잡을지도... 또한 유다는 계산을 잘해서 사도단의 돈을 관리했으니 유다의 현실적인 계산능력은 유익이 되기도 했던 셈이다. 그러다 그 계산능력을 잘못 사용하여 은전 30냥에 스승을 배반해버렸지만 말이다.

 

유다에게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비유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이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7-8)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함께 생활하는 내내 유다를 위해 기도하셨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유다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잘 보살피며 사랑을 많이 주겠습니다'라고... 그래도 그분은 유다를 뽑으셨고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가셨으며 최후의 만찬에도 초대하셨다. 유다가 찾아올 줄 알면서도 유다가 아는 장소를 피하지 않으셨다.

 

오늘은 거의 '그것이 알고 싶다'같은 다큐멘터리였다. 그러나 그분은 이보다 더 진지한 고민을 밤새워하시며 기도하신 후에 유다를 뽑으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크나큰 메시지가 아닐까.

 

나는 배반할지도 모르는 유다를 사도로 뽑았다.
다시 죄지을지도 모를 너에게 복을 내려준 것처럼 말이다.
너도 나처럼 다른 이에게 기회를 주어라.
나는 사람의 운명을 정해두지 않았다.
저마다 하루하루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거란다.
혹시 모르지 않느냐
네가 준 기회가 그 사람의 운명을 되돌려놓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