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松竹/김철이 2020. 5. 2. 11:56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https://youtu.be/BX9Q0B_hdfo


언젠가 우리는 주님 앞에서 유턴 지역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유턴은 주님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게 된 이들이 먼저 보여준 선택의 길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고 그분을 믿는다고 말했던 이들이 주님에게 등을 돌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생명의 빵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말씀 중 당신의 의미와 우리의 믿음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등장하고 나서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이와 같았습니다. 그것도 제자들, 곧 삶에 있어서 당신을 따르겠다고 모여든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보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을 미워한 사람들의 태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곧 성당에 앉아있는 많은 이들이 주님에게 등을 돌리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냉담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냉담자들 중 많은 이들이, 또 지금도 성당 한켠에 손을 모은 이들이 언젠가 마주하게 될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매일 미사를 드리는 사람으로서는 주님의 성체를 나눌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몸"하면 사람들은 "아멘"하고 성체를 영합니다. 이 성체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입니다. 이 빵은 주님 앞에 나와 있는 이를 가리지 않고 나누어집니다. 그럼에도 이 성체를 영하는 이들이 이 영성체를 끝으로 주님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의미는 손에 만나를 기억하는 이들과 다르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성체를 영하는 것은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지체가 되었다는 말이고, 그것은 우리가 주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옛날 주님의 빵을 기억하며 모여 왔던 주님에게 열광했던 그들이 정작 당신의 생명의 빵을 먹으라는 주님 말씀에 보였던 반응은 거북하다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신앙을 선택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믿지만 자녀에겐 자유를 주겠노라 너그러움을 발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강요라는 폭력적인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선택도 강요도 가능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의 근본을 주셨음을 고백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곧 생명의 빵, 곧 죽어서 얻게 되는 구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며 누리는 행복의 근본이 되는 진리입니다. 


곧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는 이라면 손에 쥐어진 빵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주님 앞에 손을 벌려 빵만을 바라는 사람들. 그들의 믿음은 어느 누구보다 강렬하고 열정인 듯 보이지만 언젠가 그들은 분명 되돌아가야 하는지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알고보면 하느님에게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바랄 게 없거나 기대하지 않게 되면 그분처럼 살라는 말은 거북한 말이 되고 말 겁니다. 그럴 때 물론 그 청을 들어주겠다고, 당연하다고 말하는 달콤함을 따라 신앙을 유지한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것이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머지 않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자신이 이미 주님 앞에서 되돌아 자신을 향해 걷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구도 이 말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