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松竹/김철이 2020. 4. 13. 09:15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에겐 변하지 않는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죽음을 이긴 생명이기에 그분과 함께 묻혔던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아닌 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이 살아났다는 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두려워합니다. 미리 예수님의 부활을 왜곡할 준비까지 한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무서웠던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올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살아갈까 두려워 한 백성의 원로들과 수석사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인생에 대한 선배들이고 스승들이며 또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두려워한 부활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올해 부활을 묵상해보려 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두려웠을까요? 사람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선 예수님이 삶을 대하는 기준은 자신을 위한 방향이 아닌 내 밖에 있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들 사이에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아셨으나 그것은 당신의 자격이나 기술에서 나오는 자기애나 과시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필요한 것을 하셨습니다. 단지 그것으로 끝나는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사람들이 어떤 부정한 방식으로도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괜찮다고 말하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 또 적당한 선에서 이루어지는 필요한 부정에 대해서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이의 삶은 우리가 상상해보면 그리 잘 살수 없을 듯 보입니다. 적당한 잘못도 저지르고 크지 않다면 남에게 조금은 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더 잘 살 수 있고 부유하게 사는 지혜로운 방식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 하나 없이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분에게서 우울함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분 곁에서 자신의 삶의 자리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오히려 그분에게 올 때는 주변을 둘러보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나섰습니다.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삶으로 자신들의 행복을 찾았던 겁니다.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적인 선을 가르쳐왔고 발전이라는 이름 속에 그 발전을 누릴 사람과 발전에 희생될 사람들을 늘 만들어 내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누릴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때로 힘으로, 때로 권력으로, 때로 돈을 지니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 위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진 이들도 늘 행복하지 못했고 그래서 세상에서 행복의 개념은 단순한 찰나의 순간에만 허용되는 가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가 행복하려 하지만 모두가 불행하게 사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지 오래였습니다. 예수님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 속에서 유일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 사람이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이에게 은총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이 아닌 이미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알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하는 우리입니다. 그분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보여주는 사람을 기준으로 우리는 생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특별함을 지닌 사람이 아닌 처음부터 존귀한 우리의 모든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숱한 사연과 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우리 안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 소중함을 마음과 삶 안에서 찾아내는 행복한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동안에 늘 없어지지 않은 은총을 아는 것이고 우리가 늘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이유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 기쁨이라면 상대적으로 유한한 생명을 지닌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부러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세상을 행복하게 살 조건을 이루었다는 모든 이들의 편견을 무너뜨리는 사건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뭐 그리 행복하겠냐고, 결국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들의 공식이 들렸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그분의 모든 삶이 모두 살아났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때부터 만들어 낸 편견에 시달리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마치 순교의 고통 속에 사는 것인 듯 이야기하고 있지만 예수님 부활의 진실은 우리 곁에서 늘 행복하셨고 우리가 기뻤던 모든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사랑 속에 있으며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은 사랑을 기준으로 바라보면 당연히 우리가 조심할 수 밖에 없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 길은 경계에서 위태하게 걸을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걸어갈 때 결코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장애물들입니다. 


혹여 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하느님은 그 경계를 그어 우리가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다시 그 경계 밖에 넘어가지 않도록 얼른 되돌아 와야 합니다. 돌아서서 바른 길로 가는 것이 '회개의 길'입니다. 여러분의 반성이 아닌 다시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부활을 기뻐합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부활을 나타내는 많은 말이 있지만, '마리아야!',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심은 우리 곁에 있던 그 좋은 이가 여전히 함께 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사람 좋은 것을 모르는 이는 부활을 기뻐하면서도 고민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너무 좋은 주님의 부활을 이렇듯 홀로 지내며 기억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그러나 우리가 다시 만날 때 더 반갑겠다는 확실한 희망으로 즐거운 나른함을 즐기려 합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