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수필

늘 한결같이 반가운 사람

松竹/김철이 2020. 2. 7. 09:04

늘 한결같이 반가운 사람

 

                                                김철이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재산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라 하였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어지는 인연의 끈은 인력으로는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중요시했고 사내가 입신양명 출세를 하려면 인생길에 덕을 줄 사람을 곁에 많이 두라고 하였다. 그랬듯이 나에게도 가뭄에 단비같이 아주 반가운 사람이 있다. 곁에 없어도 바로 눈앞에 있는 듯 숱한 세월 무심히 스쳐 가는 몇 오라기 바람결에도 이렇다 할 아무런 소식도 안부도 전하지 않다가 어느날 겸연쩍은 웃음을 소리 없이 웃으며 불쑥 나타나는 사람. 오랜만에 만났으면 지나가는 말이라도 적지 않은 세월 어찌 살았는지 떨어져 사는 동안 무사 무탈했었는지 이런 방귀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는 멀대같지만, 가슴 깊이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은 세상을 통째 바꾸어놓을 수도 걸림돌 하나 없이 흘러만 가야 할 역사도 거슬러 올려놓을 수도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통째 준다고 해도 바꾸지 못할 정도로 아주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듯이 나에게도 그 어떤 야생화보다도 더 화려하고 울음으로 대자연을 희롱하는 그 어떤 야생조의 날갯짓보다도 더 아름다운 만남이 있다. 비록 지금은 가끔 꿈길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저승과 이승의 만남이지만, 꿈길에서조차 헤어질 때 손 놓기 싫어 몸부림치는 만남, 숱한 벗을 옆자리에 앉혀놓고도 참으로 좋은 친구이고픈 반가운 만남, 언제나 함께해온 만남처럼 허리띠 풀어놓고 늘 너털웃음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사람.

 가끔, 아주 가끔은 서로 등 기대고 모진 세월에 할퀴어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하루에 골백번 만나도 아주 편안하고 반가운 사람은 어차피 홀로 갈 인생살이 몇 걸음 함께 걸어줄 벗으로 두어도 좋을 것이다. 힘겨운 세상을 살다가 너무 힘들어 꺼이꺼이 울고 싶을 때마다. 손잡고 함께 울어줄 사람이 있다면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살이에 더없이 큰 복일 것이다. 무단히 생각날 때 전화상으로도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우연히 길을 걷다 마주칠 때도 서로에게 눈인사 정답게 나누며 마음을 전하는 그런 정겹고 반가운 사람, 그런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이 된다는 건 살맛나는 세상에서 참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부족한 것이 수없이 많은 나를 그런 보배로운 사람으로 여겨주고 본인 역시 내게 보배로운 존재의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그를 만났던 시절은 내 나이 열여섯 성치 못한 육신 탓에 세상만사가 꼬인 거로 느껴질 때였다.


 기억의 두레박으로 흘러간 나의 과거사를 퍼 올려 다시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금쪽같은 소중한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했으며 인간사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만나는 인연마다 그 사람이 떠나면 누군가 그 자리를 메꾸어 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세상 뭇 인연들을 대했던 것 같다. 그랬으니 삶의 아무런 의미조차 느끼지 못했을 때 살아있는 생명이 왜 소중하며 세상 사람들이 왜 그 소중한 생명을 잘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정신을 일깨워 주었던 삶의 보배 같은 사람과의 인연을 길게 지속해 나아가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 시절 나의 삶의 신선한 향기가 되어주었던 그는 열여섯 동갑내기 사내아이였다. 그를 만난 첫인상은 내면적으로는 서로 마음의 빗장을 열어놓고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외면적으로는 감히 내가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그 시절 그 나이 또래는 머리를 기른다는 행위는 쉽사리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시절 그 나이 또래라면 중, 고등학생의 신분일 터이고 당시 중, 고등학생들이라면 머리를 삭발했었을 때인데 그는 단정하게 머리를 길러 빗어 넘겼었다. 몸에 지닌 장애가 평생 삶의 멍에가 되어버린 나로서는 당시 우리나라 실정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도 받아줄 정규 교육시설이 없었으므로 두발의 자유는 있었으나 혈액순환이 순탄치 않아 머리 전체에 종기가 자주 생겼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온몸에 피멍이 가실 날이 없어 시도 때도 없이 앞뒤 좌우로 넘어지기 일쑤, 딱딱한 온돌방 바닥에다 아물 만한 종기 상처 부위를 부닥쳐 터진 상처가 또 터져 핏덩어리가 쏟아지기 일쑤였던 터라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간혹 머리를 기른 또래 아이들을 볼 때면 무척이나 부러운 생각이 들곤 했었는데 그 아이를 만나니 친근감보다 반발심이 앞서는 것이었다. 민우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아이는 아버지가 세무공무원이셨는데 서울에서 부산으로 정근을 오시게 되어 가족들이 아버지 직장을 따라 이사를 왔고 민우는 몸이 허약해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휴학 중이었다. 민우는 비록 건강은 남들보다 좋지 않았으나 따스함을 전하고 웃음을 전하고 소리 없이 미소 짓는 표현들 속에서 애틋함과 따스한 정을 나누는 그런 반가움의 전령사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민우를 만난 것은 열여섯 되던 해 가을이었다. 가지에 맺은 정을 두고 가려니 못내 아쉬워 붉게 물든 갖가지 나뭇잎들은 떠나기 싫어 대자연 섭리에 억지라도 부리는 듯이 온통 길바닥을 뒹굴고 있는데 장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를 꿈꾸며 길가로 난 현관문을 통해 을씨년스러운 바깥을 혼자 내다보며 센티한 시상으로 시를 구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우리 집 현관 앞을 지나가는 듯하더니 되돌아와서는 현관문 기둥에 붙어서며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심심하지 않니? 난 무척 심심한데 보아하니 나이가 내 또래인 것 같은데 나랑 친구 하지 않을래?” “니, 누고? 누군데 남의 일에 훼방을 놓노! 남의 일에 상관 말고 가던 길이나 가봐라. 고마.” 다정하고 부드럽게 다가온 민우의 말투보다 어릴 적부터 낯가림이 심했던 나의 말투는 퉁명스럽고 괴팍스럽기 그지없었다. “난, 민우라고 해 서울에서 이사를 오다 보니 친구가 없어. 그러니 네가 나의 친구가 돼주면 고맙겠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오데. 친구 할 사람이 없어 너 같은 서울내기하고 친구를 한단 말이가?” 그 시절 부산에 거주하던 부산 토박이 아이들은 야박한 서울 인심에 빗대어 간혹 서울 말씨를 구사하는 아이들이 눈에 띌 양이면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좋은 고래 고기 삶아 먹고 볶아먹고 오~ 땡 큐!”라고 놀려대기 일쑤였다. 

 

 그 지역 갈등의 상처 또한, 어른들에게 물려받은 것이었겠지만, 아이들 세계에서는 심각한 지역적 갈등이었다. 게다가 서울 아이들을 놀리는 데 있어 왜 고래고기가 등장하고 다마네기 즉, 양파가 왜 등장하냐면 그 시절 가까운 울산에서 많은 양의 고래고기가 들어와 흔했던 반면에 부산 토박이 중 고래고기를 즐겨 먹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고 부위에 따라 열두 가지 맛을 낸다는 고래고기를 수육으로도 즐겨 먹지만, 고래고기를 양파를 곁들여 볶아 먹어도 일미 중의 일미라는 유례로부터 시작된 것이란다. 민우와 나는 몇 차례 옥신각신하다가 부모 형제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조차 거리낌이 없게 털어놓고 그 어떤 허물마저 덮어줄 영혼의 친구가 되었고 하루도 못 보면 몸살이 날 정도였다. 민우는 철이와 친구가 된 덕분에 영양가가 너무 높아 잘 먹어야 본전이라고 하는 고래고기 먹는 법을 배우기도 했었다. 열여섯 또래의 친구들은 서로의 인생에 보배로운 존재로 영원한 기억 속에 살자고 굳게 약속하였고 삼 년여에 걸쳐 세상에 둘도 드문 벗으로 살다가 따뜻한 가슴을 지닌 민우는 천년이고 만년이고 함께 하자던 철이와의 굳은 약속을 뒤로 남긴 채 불의의 열차사고로 홀연히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작가의 꿈을 이룬 철이는 민우와의 진한 우정을 못내 잊지 못해 언젠가는 민우와의 우정을 글로 옮기리라 다짐하며 매년 가을이 오면 기억의 두레박으로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절 민우와의 옛 추억을 길어 올려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좋은 고래 고기 민우야! 보고 싶다.”라며 가을 허공에 민우와의 진한 우정을 날려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