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
김철이
그이는 언제나 웃고 있어도 표정 한켠이 늘 외로워 보였다. 그이는 애써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이는 늘 겸손하고 조용했었다. 그이는 말 수는 적었으나 내실이 알차 보였다. 그이의 곁엔 누구라도 쉽게 다가설 수 없었다. 그이의 곁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이의 표정은 늘 쓸쓸했으나 가슴속엔 따뜻한 정이 흘러넘쳤다.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내 나이 여섯 살 때였다. 어린아이 시각으로 보아도 그이의 영혼은 욕심이 없었고 밝은 햇살처럼 화사해 보였다. 그이의 입가에는 사시사철 홍시 익는 냄새가 떠나질 않았다. 그이의 가장 친숙한 벗은 곡차라 하였다. 그이가 술을 마시게 된 근본적 이유는 나라의 분단이었다. 그이를 처음 만났던 곳도 술이 관련된 곳이었는데 그곳은 가정집에서 몰래 밀주를 담가 생계를 이어가던 밀주 집 양지바른 대청이었다. 그이는 한국전쟁 때 가족을 북한에 두고 홀연 단신 남하한 실향민이었다. 그이는 주위에 사람은 많으나 늘 외톨이 아닌 외톨이로 지내던 날 두 번째 벗으로 삼고 싶어 했었다. 그이는 왜소한 체격에 걸맞지 않게 배포도 크고 정 많고 눈물 많은 사십 대 중반의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가 가장 신나 하시며 얘기의 꼬리를 놓지 않을 때가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전쟁사를 내게 옮겨 전할 때였다. 항상 그랬듯이 홍의 장군의 홍자만 떠올려도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어디서 그런 신명이 나오는지 마냥 신나 하시며 떠들기 일쑤였다.
내가 그이를 처음 만났던 시절은 내 나이 여섯 살 되던 해 봄이었다. 그 날도 다름없이 양지바른 밀주 집 대청에 앉아 어머니와 함께 따뜻이 부서져 내리는 봄 햇살을 쪼이고 있을 때였다. 이른 시간이라 애주가들의 발걸음은 멈춰있었는데 때마침 밀주를 숙성시키기 위해 가마솥에 찹쌀고두밥을 찌던 밀주 집 주인아주머니 내게 큼직한 찹쌀 고두밥 한 덩이를 건네주셨다. 거의 매일 거듭되던 일이라 어린 나는 예사로 받아먹곤 했지만, 어머니는 간혹 미안한 표정을 짓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 서민층 살림살이는 여유 있는 가정이 극히 드물었고 그 밀주 집 살림살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밀주 집 아저씨 아주머니 슬하의 자식이 아들 아홉, 딸 한 명이었는데 자식은 많으나 일정한 벌이가 없으니 호구지책으로 나라에서 엄격히 금했던 밀주를 담가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단골 애주가들을 상대로 생계를 이어갔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 누구나 여유롭게 배를 불리기라 흔치 않았다. 밀주 집 아저씨 네도 예외가 될 수 없었을 터, 한 창 먹을 나이의 고만고만한 자기 슬하의 자식들을 두고 매번 내게 찹쌀 고두밥을 건네주셨던 밀주 집 아주머니의 사랑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날, 밀주 집 아주머니가 주신 고두밥을 막 입으로 가져가려 할 때였다.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사립문을 밀치고 비교적 왜소한 체격의 한 남자가 마치 어릿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으로 그이가 들어섰다. 그이의 옷차림은 볼거리가 부족했던 그 시절 사람들을 잠시 웃기기에 충분했었다. 아래위 옷은 온통 붉은색의 변형된 갑옷의 형체를 갖추고 있었고 머리에 쓴 모자 역시 먼 옛날 장수들이 전쟁을 치를 때 착용했던 투구와 흡사했었다. 게다가 허리엔 장난감 긴 칼을 차고 있었으니 그런 모습을 처음 대하는 낯설고 우스꽝스럽다기보다도 두려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머니 등 뒤로 숨은 나는 붉은 옷의 사나이 동태를 놓치지 않고 줄곧 살폈다. 서로 간의 탐색이 끝나고 긴장이 풀린 뒤 왜 하필이면 다른 색상 다 놔두고 붉은색의 옷을 입느냐고 물으니 자신이 홍의장군 곽재우의 먼 후손이고 홍의장군처럼 나라와 민족을 애달도록 여기는 사람이 없었기에 국토가 둘로 분단이 되었다며 자신을 만날 단 한 사람에게라도 더 곽재우 장군의 나라 사랑 정신을 불어넣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그이를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그이의 정신이 옳잖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이가 긴장이 아직 다 풀리지 않은 내게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다른 말이야 다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처음 보는 내게 남북통일이 되면 자신의 고향인 금강산엘 꼭 데려가 주마 던 말은 철부지 어린 소견으로도 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거짓 없는 그이의 본심이었다. 그이와 내가 몇 십 년 세월의 벽을 뛰어넘어 가장 친한 벗이 되고 난 뒤에도 줄곧 변함없이 같은 말이 이어졌는데 고향 금강산을 얘기할 때면 눈가에 이슬이 절로 맺히곤 했으니 말이다.
그이는 홍의 곽재우 얘기만 나올 때면 여느 때와 달리 열을 올리곤 했었다. 그이는 1973년 2월 12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창의대절(倡義大節)을 기리고자 "홍의정"이라 명명하고, 홍의정 상량문과 홍의정 기문에 게시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곽재우 장군의 공적비 하나 세워주지 않는 나라와 국민들의 마음을 원망하며 안타까워했었다. 그이는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후손으로 선조님의 영전에 먹칠하지 않으려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계속했었다. 그 날 이후 그이와 나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이의 입을 통하여 곽재우 장군의 전공 담을 들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 때 왜병이 침입하여 말고삐를 한양으로 향하자 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4월 22일 전국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켜 17명의 장수와 수천의 의병을 거느리고 기강, 정암진, 현풍, 창영, 영산, 화왕산성 등의 전투에서 신출귀몰한 유격 전술로 백전백승을 하였고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죽음으로써 일본이 군사를 회군함에 따라 종전됐던 전쟁사를 들려줄 때면 자신이 먼저 신명이 나서 엉덩이를 바닥에 가만 붙여놓지 못했었다. 마치 철부지 어린애처럼 자신이 왜구들의 머리를 들지 못하게 했던 의병장 곽재우 라도 된 양,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 가족이 몇 차례 이사하는 동안 그이와 연락이 끓였었는데 돌고 도는 풍문에 따르면 그이가 병명 모를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는 설과 심한 알코올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가 퇴원했는데 그 뒤로 그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이의 행방을 알 듯도 싶다. 내 어릴 적 그이를 대하던 수많은 주위 사람들은 제대로 된 정신상태로 보았던 사람이 흔치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이의 모습이 보기에 따라 어느 한 곳이 모자라는 것과도 같았고 철부지 아이와도 같았으며 때로는 누구보다 속이 차서 손톱 하나 들어갈 곳 없이 빈틈없는 사람으로도 여겨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이는 쓴웃음을 웃으며 “살아있는 사람들이 내 속을 누가 알겠니? 내 속마음을 아는 건 겉으로 죽은듯하지만 속으로 살아있는 산(山)은 알 거야. 그래서 난, 세상에 살 만큼 살다가 내 속마음 훤히 알아줄 지리산으로 들어갈 거야. 그러다 남북통일이 되는 철이 널 데리러 올게. 그때 철마다 이름이 바뀌는 내 고향 금강산 구경하러 가자꾸나.” 그이와 정답던 그 시절 조용히 들려주던 그이의 나지막한 음성이 내 영혼을 불러 지리산 계곡마다 메아리로 흩으러 놓으니 그이는 분명, 지리산 깊은 계곡 그 어디엔가 행복한 영혼으로 살고 있으리라. 다만 아쉬운 건 그이의 정겨운 목소리에 실어 들려주던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전공담(戰功談)을 더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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