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하나/"교회 내의 청년들을 생각하며..."

松竹/김철이 2020. 1. 9. 09:21

"교회 내의 청년들을 생각하며..."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50이 얼마남지 않은 믿지지 않는 나이에 다시 청년 지도 신부를 맡았습니다. 이제 같이 호흡을 하거나 형이나 오빠로 불릴 수 없는 삼촌이자 잘못하면 젊은 아버지 뻘이 되어버린 터라 본당에서도 어색한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모든 구성원 중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시기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어떤 젊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고 만들어야 하는지 증언하는데는 주저할 이유는 없을 듯 합니다. 



저는 천주교 부산교구 3지구 하단지구의 청년 지도 신부입니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그러니 화면 속의 예수님은 실존했던 분을 조금도 닮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실제 모습은 멋진 서양인이 아니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예수님을 표현할 때 그분은 언제나 '청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중년의 예수님을 본 적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멋진 노년의 모습으로 재림하신 예수님의 자리를 탐내기도 하지만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언제나 청년의 풋풋하고 생기넘치는 모습이셨습니다. 


태어나 생명을 기대어 살아야 하는 유년기를 거쳐 배워야 하고 배운 것을 지킴으로서 성장을 하는 청소년기를 지내며 스스로의 뜻을 세우고 실천해가며 세상을 알아가는 그리고 세상을처음으로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청년기입니다. 



교회에서 청년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랜 일입니다. 많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주일학교에 관한 이야기일 뿐 예전에도 성당의 청년들은 그리 많은 인원의 단체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문제라고 말하지만 그 때부터 우리는 교회 안의 청년들에게 무감각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늘 청년들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거의 모든 본당에서 청년회라는 이름의 조직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강조하고 시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저 청년회가 모여 회합을 하고, 성당에 무리 지어 다니던 때가 있었고, 어떤 곳은 레지오, 성경 공부 등의 신앙활동을 하는 곳도 있고 또 생활성가팀을 구성하거나 그것으로 미사를 담당하는 본당들도 있습니다. 교구는 지도자에 따라 성령기도회, 성서사도직, 선택, 떼제 기도회 등을 본당에 홍보하며 활성화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아직도 존재하고 각각의 모습으로 나름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청년 문화라고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또 이런 문화와 함께 청년들이 존재하는 방법에는 주일학교 교사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머니 교사들의 활동이 넓어졌지만 한 때는 교사회의 구성은 경력자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청년들, 초기 대학생 청년들로 채워졌던 시기도 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는 않지만 주일학교의 위기와 더불어 청년이 된 이들도 줄어들며 교사들을 하는 청년들도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또한 청년회와 주일학교 교사회의 어색한 관계는 본당 별로 여전하기도 하고 또 통합되는 분위기도 존재합니다. 





사실 청년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구성원은 아닙니다.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존재 자체로 어떤 것도 가능하고 그냥 있어도 괜찮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청년들의 모습도그렇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성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며 머무는 시간이 아닌 존재로서 성당을 새롭게 만들고 유지하는 역할을 청년들이 담당해야 합니다. 어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하는 활동으로 신앙을 평가받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도 그 신앙의 정도를 계측하거나 평가할 수 없습니다. 


청년들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독립체인 청년이 성당에 나오는 것은 당연히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당에서 '청년회'라는 조직을 이루고자 하는 이유, 그리고 무엇인가 청년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어떤 것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성당에 청년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어떤 계기라도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 또한 청년기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교회를 새롭게 하고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에 이 시기가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함께 하는 신앙의 힘으로 활동하고 더 나아가 멋진 장년과 노년으로 나아가 교회의 굳은 기둥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까지 아주 많은 시도들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 처음에 옳다고 믿었던 판단과 실행이 후에 분열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청년들이 성당을 떠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근본의 이유는 우리가 되살려야 할 것이 있고, 변화된 세상 안에서 개념과 내용을 바꾸어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새로운 해법을 고민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도 있고, 또 근본에 대한 고민과 수정으로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없고 어떻게든 어떤 방법이든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근본을 바꾸는 일입니다. 방법이 같아도 근본이 바로 서고 시작하는 일들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급하게 사용하는 방법은 임시방편도 될 수 없음을 지금까지의 우리의 모습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이제 기도를 해야 할까요? 성경을 읽어야 할까요? 관심 있는 이들끼리 집단을 만들고 활동을 하면 될까요? 또 새롭게 유행하는 신앙의 유형을 받아들이고 노력하면 교회가 다시 히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모두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현재 진행형인 상태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자녀인 자신을 아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을 살며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희망으로 사는 것이 청년들 모두가 알고 기억하며 살아야 할 근본입니다. 그리스도는 2천년 동안 항상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한 해가 얼마나 무서운지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그 청년의 죽음을 미화하지 못했고 그의 삶이 가치 없다 말하지 못했기에 세상은 그나마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오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세상의 영향을 많은 받은 교회라서 이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늘 '영웅'을 기다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도 우리 안에 영웅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생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바꾼 것은 힘으로, 기술로, 재능이나 재력, 혹은 완성된 정치력으로 가능했던 게 아닙니다. 그는 바르고 정직하게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고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선함으로 사람들의 정의감을 자극했고 누구라도 소중함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작은 변화가 세상의 물결을 이끌었고 세상은 사랑을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로 그나마 정의와 선을 지키며 살 수 있었습니다. 



청년. 푸른 날의 우리의 모습이 결국 이 교회의 가을이 아름다운 단풍이냐, 아니면 싸늘하게 누운 낙엽이냐를 결정 짓습니다. 지금 교회는 푸른 잎을 찾아 볼 수 없는 앙상한 나무. 덩치는 굵으나 잎은 모두 시들어 떨어지고 마는 겨울을 사는 여름을 지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