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셋/청년.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

松竹/김철이 2020. 1. 11. 08:05

청년.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교회의 시작 :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교회





가장 먼저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한 마르코 복음은 공생활로 시작합니다. 곧 교회의 시작을 그리스도로 생각한다면 그분의 출생을 먼저 생각할 수 있지만 교회가 발견한 하느님의 뜻,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 가운데 사셨던 한 청년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의미가 워낙 크기에 우리는 그분의 성탄을 기뻐하며 벗어날 줄을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이 알려주는 진실 중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그분의 탄생을 몰랐다'는 점입니다. 그분이 태어날 곳이 베들레헴이라고 예언되었지만 누구도 그 도시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없었고 한 아이가 마굿간에 태어났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땅에모인 다윗의 후손들은 이 아이의 탄생을 마굿간으로 내 몰아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아니 모든 아이를 귀하게 생각했다면 가능하지 않았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들로 가득할 뿐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이들은 이미 예언을 잊었고 입으로만 반복하는 중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그들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분의 탄생을 '겸손'이나 '가난'이라는 단어에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성인들이 전해준 이야기이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십자가의 죽음 만큼 확실한 마굿간의 탄생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이, 또 그런 처지에서 자란 사람들에 대해 사회는 냉정한 예측과 정해진 비극적 운명의 길로 그를 판단합니다. 구세주는 자신의 백성들 사이에 태어나 이방인의 땅. 어쩌면 원수의 땅인 이집트에서 가장 위험한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는 없습니다. 고작 우리가 가진 기록이라야 열두살의 예수님이 성전에서 벌이신 소동이 전부입니다. 그 때 이미 주님은 성전을 아버지의 집으로 알고 계셨다는 확인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시작이 된 그리스도의 모습은 40일의 단식을 끝낸 후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공생활'의 예수님은 갑자기 청년 예수로 등장한 것입니다. 




청년 예수의 모습 : 아무것도 없는 어떤 것도 아닌 그리스도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청년의 모델은 먼저 세상으로 나오신 그리스도의 첫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처음 나타나셨을 때의 모습은 구세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당신이 떠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청년 그리스도에게 너무 많은 수식어와 상상력을 동원해 그 모습을 가려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 가셔서 40일을 단식하며 유혹에 시달리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유혹을 모두 이기시고 공생활에 나서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유혹의 결과를 생각해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준비는 예수님을 단단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예수님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도 모두 없어진 상태에 계셨습니다. 




유혹 하나 :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





40일을 단식한 예수님. 그분의 상태는 몹시 허기진 상태셨습니다. 그 앞에 등장한 유혹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허기부터 면하라'는 권고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 해도 자신이 준비가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이 세상이 가르치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당장 필요했던 것은 무엇보다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기준은 모든 것에 중심과 시작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쁘거나 악한 일이 아니라면 이 기적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고 '먼저' 해야 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일은 선악의 기준을 떠나 '필요한' 일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거절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은 '허기진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사람들이 처음 보게 된 예수님의 모습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나온 앙상한 모습의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자한 모습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도움을 주실 분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가까운 예수님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분의 시작, 곧 하느님의 뜻이 펼쳐진 처음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혹 하나 : "성전에서 뛰어 내려 보라!"



보통 사람이 아무것도 지닌게 없어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나름 자존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마저 없다면 사람들의 무시와 외면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먹을 것을 마다한 예수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유혹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예수님이시니 성전에서 뛰어 내려 천사들이 두 발을 떠받드는지 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었으므로 만약 예수님이 뛰어 내리셨다면 당연히 그분은 털끝하나 다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는 분이니 뭐라도 증명을 해야 사람들이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분의 기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런 상상이 불가능해보이지만 예수님은 당신에게 요구된 이 당연한 일을 거절하십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먼저 말하고 사람들의 복종을 바라시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권위를 내세우고 자격을 보여주며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며 자존감을 내세우는 우리의 눈에 예수님의 이 거절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허기진 예수님. 그리고 무능력한 예수님. 도무지 아무것도 또 어떤 것도 아닌 예수님입니다. 




유혹 하나 : "나에게 경배하라!"



악마의 또 하나의 유혹은 세상의 가장 화려한 것들을 보여준 후 예수님께 전해집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악마가 받은 것이니 자신에게 경배하면 이것을 다 주리라는 것입니다. 이 화려한 모든 것들은 그 아래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곧 사람을 구하러 오신 구세주에게 사람들은 당신의 모든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며 살면서 서로 싸우고 다투어 얻은 것들로 세워진 모든 것은 하느님께 바친 듯 하지만 악마는 자신이 받은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경배하라는 말은 자신을 따르는 것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방법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하느님의 보호를 앞세우고 그것으로 서로 다투고 싸워 이기는 것을 하느님이 자신에게 허락하신 것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정복과 정복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불목이 정당화되며 권력투쟁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들은 높은 건물들로 하느님께 감사를 표했고 그것조차 점점 높아지는 형국을 이루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서로 싸우고 이긴 전리품으로 가득할 때 사회는 자신이 '발전'한다고 믿었고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요구한 악마의 말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허락받은 듯 서로 다투며 살아가는 것을 예수님이 이용한다면 이 많은 이들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쉽게 가질 수 있는 이 유혹의 이야기에 예수님은 그를 쫓아 버리십니다. 




"초라한 청년 그리스도. 그러나 그에게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성당에서 청년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청년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시에 청년은 무엇도 될 수 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공식이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함께 살면서도 유일한 존재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며 살아갑니다. 어릴 때는 세상을 사는 법도 배워야 하고 스스로 깨쳐야 하는 것이 늘어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각자의 판단과 실천에 따라 고유한 삶을 만들어 냅니다. 



청년은 그 경험이 쌓여 자신의 방법이 고정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정관념에 따른 모든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자신이 할 일과 생각을 스스로 판단하고 나름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청년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래서 하느님을 당신의 모든 것으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청년들은 그런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보고 판단하며 결정하는가에 따라 세상은 하느님의 세상이 될 수도 또 개인적인 욕심에 왜곡된 상황으로 내 몰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수많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경험과 규정들로 굳어져 버린 상태입니다. 틀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나빠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것은 옛 이스라엘처럼 죄라는 단어 앞에 굳어 버린 채 사랑이 메말라 버린 상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틈에서 사랑을 시작했고 싹을 틔웠으며 사람들은 그 덕분에 자신들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생명을 느끼고 숨쉴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스스로에게 자신부터 잘 준비하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청년들은 자신이 아닌 재주나 능력으로 세상을 대하려는 시도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방법으로 미래의 선한 일이나 큰 일을 도모할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빈털털이이지만 그러나 꽉찬 하느님의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그 모델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닮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마음을 돌려 그리스도께 방향을 맞춰보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