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둘/교회 안의 청년들의 활성화란?

松竹/김철이 2020. 1. 10. 09:33

교회 안의 청년들의 활성화란?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도대체 청년들의 활성화는 무엇을 말하는 건가? 많이 나오게 하면 되는건가?'



한 신부님이 묻습니다. '도대체 청년들의 활성화는 무엇을 말하는 건가?' 많이 나오게 하면 되는건가? 


교회 내의 청년들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청년에 대한 고민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정확히 하나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나마 대게는 그 숫자에 관한 문제에 도달하긴 합니다. 곧 교회 내의 청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청년들의 부족함에 대한 위기 의식과 조금 다른 결로 늘 존재했던 문제는 '청년회'의 활동과 '교사회' 등의 청년 단체들의 활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청년회 회원이 몇 명이냐? 혹은 청년 시기에 성당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나를 중심으로 청년들의 문제는 이야기되어 왔고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활성화라고 말하며 풀려고 하는 것도 이 문제에서 출발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청년들의 활성화란 무엇일까요? 본당에 청년회가 있고 그 청년회의 회원의 수가 청년회 활성화의 기본이 된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재 청년회가 존재하지 않는 본당들이 많고 본당의 청년들의 모임이 전혀 없는 곳도 있습니다. 주일학교가 없으면 청년 교사들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청년들이 없는 것도 그들의 모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교회 내의 청년들의 모임은 성당 청년회, 주일학교 교사회, 성서모임, 성령기도회, 레지오, 선택주말, 떼제 기도회 등등 다양하게 있습니다. 신부님들의 노력으로 형성된 공동체들도 있고 본당 안에서 이어져 오는 모임도 있습니다. 또 주일학교처럼 특별한 목적에 의해 또래 교사들이 모여 있는 청년의 활동도 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교회 안에 청년이 없는 것도 청년을 위한 모임이 없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모두 절박한 심정으로 교회 내의 청년들을 바라봅니다. 그 숫자가 거의 사라져 가는 것이 사실이고 모이는 곳에만 모이는 것도 어느 정도 한계점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청년의 광범위한 범위, 20세에서 35세의 범위를 넘어 40세까지 확장된 곳도 많습니다. 이런 현상은 청년들 안에서도 고령화의 움직임이 많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청년들이 없어서 청년회의 노장들이 여전히 현직으로 활동을 요구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청년회를 만들고, 청년들이 모이게 할까. 그것이 활성화라면 그것에 대해 대책을 세워야겠지요.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두 다 내려 놓고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청년들이 어떤 것을 꼭 해야 하는가? 




'청년들이 어떤 것을 꼭 해야 하는가?'




청년들이 주일학교를 벗어나 청년기에 이르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선은 주일학교를 바라보는 눈으로 청년들을 대하는 시각에서 생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일학교는 반이 있고 교리가 있으며, 선생님이 존재합니다. 방학도 있고 개학도 존재하고 시시 때때로 행사도 이루어집니다. 



청년들이 청년회를 해야 하고 가입되어야 청년으로 인정받는 듯한 문화. 그리고 본당 신부님이 청년회를 상대로 혹은 주일학교 교사들을 상대로 청년을 사목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는현실도 이런 시선을 대변합니다. 물론 또 다른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며 교구 청년 문화에 포함되는 것도 같은 입장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청년을 주일학교 학생과 비교할 것인가 혹은 성인 교우들의 모습과 비교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깁니다. 성인 교우들도 많은 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인 교우들의 신앙을 대할 때의 기준은 그들이 성체성사. 곧 주일미사에 참여 하는가에 기준을 둡니다. 곧 그가 스스로 주일을 지키고 신자로서 생활을 하는가를 판단하는 기초는 주일을 지키는가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어떤 단체에 활동을 하는가에 따라 신앙의 정도를 말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발자국만 남기는 신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그들 중 많은 이가 30-40년 전부터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듣습니다. 그 때 그들은 '청년'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청년. 범위를 좁혀 우선 이것에 접근하면 어떨까요? 



성당에 다닌다는 것은 그저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하는 이를 말하고 성사 생활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신앙활동을 하는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이 모임을 이루고 신앙적 활동을 하는 것은 너무 아름답고 보고 싶은 모습이지만 그 이전에 그들이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알고 당연한 발걸음으로 그리스도의 젊음을 살게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첫번째 고민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청년은 사춘기를 지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 성인입니다. 이 세상이 아직 그들의 온전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취업 등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과 거쳐야 할 어른됨의 단계를 계속 뒤로 미루고 있지만 적어도 신앙이 보는 사람됨의 시간은 첫영성체 이후로 세상 보다 늘 빠릅니다. 청년은 이미 교육을 받을 나이가 아닌 세상을 하느님의 땅으로 만들어야 할 사명을 받은 시간 속의 존재들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기준은 열 두살의 예수님이 아닌 공생활의 예수님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곧 우리는 청년이 청년이 되게끔하는 일들을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교육에 지치고 힘든 아이들을 성당 주일학교에서라도 편하게 즐겁게 해 주자는 너그러운생각이 성당을 '가야하는 곳' 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아이들을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교육은 성인이 되기 위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아니라그 나이에 하느님의 자녀로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청년들에게 '자율'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들을 동시에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제2의 그리스도라는 호칭과 표현 이외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돕는 노력들을 해야 합니다. 성인이 된 이들은 신앙의 문제도 일방적인 수용이 아닌 고민과 선택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고민할 것도 선택할 것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믿어라, 지켜라 하는 것은 간절한 상태에 놓인 이들이 아니라면 적합한 방법은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청년들을 청년회나 단체가 아닌 성당으로 초대하는 것이 다시 시작하는 청년 활성화의 첫단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그 내용에 대한 고민을 교회가 하고 청년들을 자신의 삶 안에서 신앙적인 부분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들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몇 몇의 우수한 인재와 같은 청년들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일을 모든 청년들에게 호소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청년이 교회를 찾는 것. 청년이 알아야 할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워주는 교회의 가르침, 청년이 청년이게끔 대하는 교회의 태도, 청년이 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노력.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동시에 노력해야 하는 주제들입니다. 


성당에 청년들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것에 이유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것을 찾아내고 비판하는 노력은 늘 그 비판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우리는 애를 써야 합니다. 우리가 놓친 것을 다시 시작하고 허리부터 매어쓰는 노력이라도 기적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