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수필

연작 수필 2부작 김치 없이는 못 살아 제1화 김치와 함께했던 세월

松竹/김철이 2016. 7. 25. 11:00

연작 수필 2부작/김치 없이는 못 살아

제1화 김치와 함께했던 세월

 



                                                 김철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시피 아무리 힘이 센 천하장사라 하여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사 이치다. 또, 인간은 먹고사는 것에 대하여 인생 전부를 투자하여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생사에 있어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아무리 천하를 다스리던 대왕도 먹지 않고는 천하를 호령할 수 없을 것이고 학식이 하늘만큼 높은 학자라 하여 먹는 것 앞에선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옛 속담에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지.'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본뜻은, 아무리 지체가 높아 수십 명의 하인을 거느린 채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양반이라 할지라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위상이 하늘을 찌를 만큼 콧대가 높은 정치인이라 하여도 결국은 다 먹고살기 위하여 평생을 던져 정치판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인구도 많고 인종도 많지만, 나라마다 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 음식의 종류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음식의 가지 수도 많지만, 나라와 민족에 따라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고 즐겨 먹는 음식이 있어 매 끼니 식사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식탁에 올라가는 음식과 반찬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끼니때마다 식탁에 올라가는 많고 많은 음식 중에 빠뜨릴 수 없는 대표적인 음식이 있는데 그 음식이 바로 김치다.

 김치의 역사를 잠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한(漢) 나라 때, 주례(周禮)》에 순무 · 순채 · 아욱 · 미나리 · 죽순 등의 저(菹)를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나라의 김치가 낙랑을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김치는 소금물에 담그거나 마늘 · 회향 등의 향신료를 섞는 정도에 그친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 시대 중엽에 고추가 수입되면서부터 비로소 오늘날의 김치와 같은 저장법을 갖췄다는 것이다. 당시 김치 재료로는 동아 · 오이 · 무가 많이 쓰였으며 꿩고기와 같은 육류를 볶아 섞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탁에 단 한 끼라도 김치가 오르지 않으면 약방에 감초가 빠진 것보다 더 허전한 것이 김치다. 날로 발전해 나아가는 세계 현대화에 발을 맞추어 가다 보니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물을 생각하는 의식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식생활을 하는 데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불과 1~2십 년 전만 하여도 밥상에 김치가 오르지 않으면 매 끼니 배불리 식사해놓고도 한 둥 마는 둥 하는 느낌이 다음 식사 때까지 늘 허전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기 아내가 잊고 김치를 담그지 못해 아침 식탁에 김치가 오르지 않을 양이면 심한 화를 내며 "이것도 밥상이라고 차렸느냐며 식사도 하지 않고 출근을 하는 남편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남편이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30년 전 어느 해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 우리나라 전 지역에 논농사뿐만 아니라 밭농사조차 심한 흉년이 들어 배추 한 포기 값이 여느 해 두세 배 심하게는 다섯 여섯 배까지 폭등하여 김치가 금치 라는 말까지 쉽게 나돌 만큼 김치가 금지옥엽 귀하신 몸이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 해에는 정말 김치를 담가 먹는 것보다 고기를 사 먹는 것이 더 싸게 계산되었었다. 특히 서민층 가정의 식탁에서 김치를 구경해 보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 해 우리나라 대다수 농가에서 밭농사를 망치다 보니 다른 농작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우리나라 국민이 1년 열두 달 365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먹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고추가 귀하다 보니 끼니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대해야 할 식탁에서조차 전쟁 아닌 전쟁이 일어나곤 하는 가정도 있었다. 호구지책으로 정부에서는 (베트남) 월남에서 고추를 급히 수입해 온 적이 있다. 그 해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에서 고추를 수입해 왔다던데, 미국인들이 아주 먼 미래를 내다보고 6, 25전, 후로 우리나라 국민들 입맛에 밀가루 맛을 익혀주기 위해 하나 아낌없이 (극빈자) 서민층 국민들에게 밀가루를 무료로 배급하고는 했었지만, 김치의 맛은 어쩔 수 없었듯이 월남 고추로 담근 김치를 울며 겨자 먹기로 먹을 수밖에 없어 먹어봤으나 우리나라 금수강산 옥토에서 수확한 순수 국산 고추로 담근 김치의 맛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순수 국산 고추는 맵다고 하여도 무작정 매운 것이 아니라 단맛과 매운맛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우리나라 민족성처럼 끈끈한 맛을 느낄 수 있지만, 월남산 고추에선 전혀 그런 맛은 느낄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독스럽게 매운맛이 순간적으로 혀를 심하게 자극하여 그렇게 맛있다는 느낌보다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나라 전 민족의 비극이자 그의 대다수 국민의 가슴에 아픈 상처를 남겨준 6, 25 동난 이 종전이 아닌 휴전이라는 핑계로 놓여있는 동안 우리나라 국민 중 서민층의 살림살이는 더욱 힘겨울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동냥을 해서 근근이 연명해 나아가는 이들도 많고 끼니때마다 문전걸식으로 하루 두 끼니만 해결하며 생명을 보존해 나아가는 이들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엔 집집이 문전걸식을 하는 걸인들이 너무 많았던 탓에 그리 인심이 야박했던 시절도 아니었었건만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했던 가정에서는 아침저녁 끼니때만 되면 아이들의 문밖출입을 금한 채 현관과 부엌의 출입을 꼭꼭 걸어 잠가놓고 식사 후, 문을 열어놓곤 하였다. 한두 사람이라면 손님들에게 음식 대접을 하는 생각으로 찾아오는 걸인들을 푸대접하지 않겠지만, 전 국민의 살림살이가 다 어려웠던 시절이라 아침저녁 두 끼니때만 치르는 일이라 하여도 집집이 찾아오던 걸인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기에 끼니때마다 찾아오던 걸인들을 반긴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우리 집에 찾아오던 걸인이 있었는데 젖먹이 아기를 등에 업은 채 명주실로 기운 바가지를 들고 우리 집 밥솥에 김이 오를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오곤 하였다. 그 걸인 말에 의하면 우리 집에 찾아오면 밥과 김치는 물론이요 간혹 국과 다른 밑반찬도 챙겨주는데 어떤 집에 가면 밥만 덜렁 한 덩어리 바가지에다 부어주기도 하고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다들 어려운 시대였던 탓에 욕설을 동반한 문전박대를 당할 때도 잦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없어서 얻어먹는 거지라지만, 어떻게 밥만 먹느냐는 주장이었고 동냥은 못 해도 쪽박은 깨지 말라는 속담도 있는데 하다못해 김치라도 한쪽 얹어주어야 밥 한 덩어리라도 목구멍으로 넘길 게 아니냐는 투정 섞인 반론이었으며 동냥은 못 해도 따뜻한 위로 한 마디만 해줘도 돌아서는 발걸음이 덜 부끄럽지 않겠냐는 하소연을 늘어놓곤 하였다. 그러나 그 반론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논리였겠지만, 본인들이 애써 노동한 돈으로 김치를 담가 먹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당시 김치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능히 나올 수 있는 푸념이요 투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 이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동절기 석 달 동안은 물론이고 일 년 열두 달 금지옥엽 귀한 존재로 살았던 김치에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김치와 함께했던 세월이 어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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