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수필 7부작 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일곱) 보릿고개
김철이
지금은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지만,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먹거리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꿈속에서조차 상상도 못할 단어인 보릿고개,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겨운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서 농가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이다. 이 시기는 음력 3, 4월에 해당한다. 살기 좋은 지금이야 아무리 살기가 어렵다 하여도 그 옛날 보릿고개를 살았던 우리들의 부모님, 조부모님들의 인생 보릿고개에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살림살이 어려워 알곡으로 지은 밥이 아니라 누룽지 삶아서 우리 삼 남매에게 나누어 주시며 행주치마 치마폭에 뜨거운 눈물을 훔치시던 어머니 아련한 모습도 접했고 박봉으로 시달리며 진 빚을 갚으려고 내키지 않는 사직서를 내고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방안 한 모서리 벽을 넓적한 등에 진 채 멍하니 앉아계시던 아버지 초라한 표정도 읽었으나 도회지에서 태어나 도회지에서 줄 곳 생활해온 나로선 보릿고개라는 큰 의미는 헤아릴 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유년시절 우리 가족도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해야만 했던 시기도 있었기에 그때 그 시절 삶의 향수를 찾아 무형 카메라 어깨 메고 추억을 걷는 나그네 홀로 당시 몸소 살며 체험했던 그 옛날, 그 삶의 맛을 보려 떠난다.
천직으로 여겼던 철도원의 옷을 벗게 되신 아버지께선 퇴직금으로 빚을 정리하고 나니 10여만 원도 채 남지 않았다. 이 돈으로는 어떤 가게도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아버지 평생소원은 철도원 옷을 벗었을 땐 철공소 사장이 되어있는 것이고 철도원으로 재직하시면서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예비 작업을 하셨다. 철공소에 필수적인 갖가지 기계를 틈이 날 때마다 하나씩 준비해 두셨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꿈을 따르지 못했고 여의치 못한 현실에 낙심하신 아버지의 몸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온몸이 퉁퉁 부어 손으로 눌렀을 때 정상인들과 달리 들어갔던 살이 제자리를 잡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감추신 아버지께선 병 치료는 뒤로 미뤄두고 그 시절 동네에서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었던 호성약국 건물 주인이 딱한 우리 가정형편을 전해 듣고 연산2동 파출소 앞에 제법 너른 빈터가 있는데 그 빈땅에 자동차들이 저녁마다 주인 허락도 없이 불법주차를 하니 땅주인 권한을 줄 테니 밤에 나가 아침까지 주차비를 받아 용돈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그 일이 정식으로 허가 난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유료 주차비 원조가 된 셈이었다. 하루 저녁 나가시면 많아 봐야 2, 3천 원을 가져오셨는데 아버지 용돈을 해도 그리 넉넉하지 못할 액수의 돈으로 가족들의 생계비로 써야만 했으니 애끓는 부모님의 심정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었겠는가 그 당시 가족들의 생계를 도울 경제력을 지녔던 이는 형님뿐이었다.
그러나 본성이 놀기를 좋아하고 큰 욕심이 없었던 형님은 하는 일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무거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읔! 하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던 부모님의 어깨를 한층 더 무겁게 했던 시절도 있었다. 가정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누이동생이 고등학교 진학시험을 치르는 날 아침, 아버지께서 누이동생에게 건네는 말씀, “영애야! 다른 아이들은 다 걸려가 와도 니는 떨어지가 온네이” 순간, 문턱에 앉아 운동화 끈을 묶던 눈이 동생의 표정이 먹먹해짐을 보았다. 어릴 적부터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본분을 차질없이 해냈던 덕도 있지만, 부모님 입으로 딸자식 시험날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의 심정은 아마도 찢어지는 듯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 운명의 길은 아무도 모르듯 누이동생의 초등학교 동창 중 한 아이가 뉘 동생이 진학했던 몇 단계 낮은 수준의 중학교엘 진학하여 열심히 노력한 결과 우수한 성적의 학생이 받는 장학금도 받게 되었고 반에서도 성적이 상위권이라 고등학교 진학원서를 누이동생과 동일한 학교에 접수했었는데 그 아이의 어머니가 온 동네 입소문을 내기를 “우리 뒷집 영애는 제 엄마 일 도와준다고 공부도 못했으니 시험에 떨어질 거고 우리 정임인 밤잠도 안 자고 열심히 했으니 분명히 걸릴 끼다.” 이 말이 돌고 돌아 우리 가족들 귀에까지 전해진 것이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부모님 심정이야 복장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가정형편이 어렵다 해도 그렇게 무시하고 업신여겨도 되는지 당장 달려가 따지려는 어머니를 주저앉힌 사람은 누이동생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누이동생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대범함을 보이며 시험 결과는 아무도 모르며 나와봐야 아는 것이니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속눈이 아닌 겉눈으로 보기엔 그 아이의 어머니 하신 말씀이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가사에 조금 도움이 될까 싶어 당시 연산5동 영남유지 옆에 있던 한창산업이라는 와이셔츠 수출공장에서 마지막 손질할 일감을 집으로 가져와 부업을 하셨는데 이 일은 말이 좋아 부업이지 온 가족이 매달려야 할 생업,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아침 밥숟가락 놓기가 무섭게 연산5동에서 연산2동까지 2백 장에 가까운 와이셔츠를 한꺼번에 커다란 보따리에 싸서 머리에 이고 와서는 불이 나게 손질하여 갖다 주고는 일감을 한 번이라도 더 가져오기 위해 손과 발엔 마치 모터를 단 것 같았다. 오죽했으면 눈이 튀어나와도 주워 넣을 시간이 없어 눈을 넣지 못하겠다고 하셨을까 밤을 지새우고 들어오신 아버지, 어머니의 일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까 싶어 퉁퉁 부은 얼굴로 몇 시간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부은 눈이 더 부을 수밖에 눈이 얼마나 부었으면 의지대로 뜨지 못해 손으로 붙어버린 아래위 눈꺼풀을 억지로 떼곤 하셨을까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시험공부에만 여념 해도 시험에 붙을까 말까 했던 처지의 누이동생은 학교엘 다녀오면 공부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불이 나게 저녁밥을 지어먹고 설거지를 끝낸 후 어머니 일손을 도와드려야 했으니 천치바보가 생각해 보아도 낙방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여도 헛웃음만 절로 나오는 것은 시험 발표날이 되자 어머니께 잠시 나갔다 오겠다던 누이동생은 고등학교 진학시험 합격통지서를 손에 들고 왔었고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아이는 시험발표를 보고 오겠다며 나간 뒤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 가족들뿐만 아니라 온 동네 어른들께 걱정을 끼치게 했었다. 자식을 놓고는 입찬말을 하지 말라시던 어머니 평소 지론이 절실히 실감 나는 하루였다. 그 후 누이동생은 목이 부러질 만큼의 어머니 큰 희생과 뒷바라지로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직장을 잡았고 그 아이는 개인이 운영하던 작은 사무실에 근무하다 결혼했다. 아무튼, 아버지께서 받아오시는 월 주차비 5, 6만 원과 목이 부러지게 한 달 내내 머리에 와이셔츠를 이고 다녀도 고작해야 2만 원도 채 안 되는 돈으로 다섯 식구가 살아야 했으니 고생이란 단어가 부끄러워 시오리나 달아날 것이다. 원래 국수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시절 이후 국수를 먹고 싶은 마음이 더욱 드물어졌다. 내가 유별나게 빵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시절 쌀을 살 돈이 없어 밀가루에 완두콩을 넣어 찐 밀가루 빵의 향수 때문이다. 춘궁기를 넘기고 목숨을 연명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이르는 뜻으로 보릿고개에 죽는다. 라는 말에 걸맞은 고생을 했었는지 몰라도 남의 고생보다 내 고생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 고생만 하시다 가신 부모님 영전에 반평생 살아온 추억의 향수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