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발표작

내 친구 영복이/(수필) 월간 한비문학

松竹/김철이 2014. 9. 23. 14:46

연작 수필 7부작 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다섯)

                                        내 친구 영복이

 

                                                                        김철이

 

 그 아이는 하교 종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허둥지둥 책 보따리를 싸서 허리에 묶고 뽀얀 흙먼지가 폴폴 나는 추풍령 고개를 숨 한번 고르지 않고 헐떡이며 달려간다. 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아이의 이마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한여름은 물론이고 칼바람이 제철을 만난 듯 제멋대로 칼춤을 추는 동지섣달 겨울에도 구슬 같은 땀방울이 샘이라도 파놓은 것인지 닦아도 닦아도 자꾸만 솟아 흐른다. 기적도 숨이 차서 목메여 울고 구름도 바람도 쉬어간다는 그 추풍령 고개를 넘어야 하는 그 아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린아이의 달음박질로 쾌 오랜 시간을 달려야 하니 다리는 오직 이나 아프고 목은 또 얼마나 말랐을까 그런데도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엇에 홀린 듯 한눈 한번 팔지 않고 곧장 집을 향해 달려간다. 가다 보면 산새들도 안쓰러워 구슬피 울어대고 길섶에 아무렇게 피어있던 야생화도 꽃물이 져갔단다.

 

 추풍령 고갯마루 아래에 자리 잡은 초라한 초가집 사립문을 당기며 불러보는 그 이름, “엄마!” 창호지가 찢어져 너덜너덜한 방문을 간신히 밀치며 들려오는 모깃소리만 한목소리, “영복이 왔니? 영순이랑 외할머니가 부뚜막에 뭉쳐놓은 주먹밥 나눠 먹어”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영복이었다. 영순이 학교에서 돌아온 오빠를 반기며 산토끼처럼 팔딱팔딱 뛰는 모습도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하고 불렀을 때 개미만 한 소리 나마 엄마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을 시엔 한 근도 채 못 되는 영복의 간은 천 리이고 만 리이고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고 만다. “엄마! 엄마는 밥 먹었어?” “으응~” “정말?” “그래 좀 전에 할머니가 아랫마을 품팔이 가시며 끓여주신 죽 한 그릇 먹었더니 든든하구나! 엄마 걱정하지 말고 어여 밥 먹어 먼길 달려오느라 배고프겠다.” 엄마의 끼니를 몇 번이나 챙긴 후에야 영복은 영순을 부엌으로 데려가 외할머니가 부뚜막에 뭉쳐놓은 주먹밥을 하나씩 나누어 먹는다. 쌀도 아닌 보리쌀로 뭉쳐놓은 주먹밥 낟알들은 두 개도 붙지 않고 독립이라도 하려는 듯 떨어져 나아갔다. 그랬든지 말았든지 보리쌀 주먹밥 밥맛은 천하일미였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하굣길에 추풍령 고개를 넘느라 숨이 턱에 찬 영복이 석삼년을 익숙해진 습관처럼 늘 그랬듯이 사립문을 당기며 마당 안으로 들어선 영복이 “엄마!” 하고 큰 소리로 불렀는데도 엄마의 목소리 흔적은 없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급행열차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영복이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엄마가 누워계신 안방 쪽마루를 향해 달려가려 할 때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있었다. 여닫이 안방 문 찢어진 창호지 틈새로 핏기없는 엄마의 손이 맥없이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복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짐작이 절로 들었고 절규하듯 “엄마! 엄마!” 하며 방문을 박차고 뛰어들었을 땐 엄마의 대답 대신 반겨주는 것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엄마의 시신이었다. 할아버지로부터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노름꾼의 끼를 버리지 못해 혼인하기 전부터 도박을 일삼아왔던 영복의 아버지는 갖은 감언이설로 다복한 가문의 무남독녀였던 영복의 엄마를 아내로 맞아놓고도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속담에 걸맞게 노름판을 전전하다 돈이 떨어질 양이면 엄마를 윽박질러 처가 재산마저 한 품 두 품 뜯어내다 마침내 기둥뿌리마저 뽑아냈으며 급기야 외할아버지를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했다는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다는 격으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몇 해 되지 않아 영복의 엄마마저 신경성 폐결핵으로 영복이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인 해부터 석삼년을 앓다 전날 밤 돈이 떨어진 아버지가 찾아와 돈을 내노라며 갖은 행패를 다 부리고 갔던 터라 자신의 비운을 짐작이라도 했던 것인지 영복과 네 살 터울 누이동생을 아랫마을 바람을 쐬고 오라며 품일 나가시는 외할머니에게 딸려 보내놓고는 혼자 외롭고 쓸쓸한 길을 떠나신 것이다. 천명을 다 살지 못하고 가실 적에 흔적이라도 남길 생각이었던지 이승의 마지막 시간에 쏟아놓은 피로 범벅이 된 엄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오열하던 영복은 까무러치기 몇 차례, 부랴부랴 이웃 아낙의 연락을 받은 외할머니와 누이동생 영순이 나르듯 달려왔을 땐 어미의 싸늘한 죽음 곁에 넋이 나간 어린 아들자식의 육신이 너부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노름꾼들을 놓아 백방으로 영복의 아버지를 찾으려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한 채 이웃 어른들의 도움으로 영복이 엄마의 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어린 상주의 배웅을 받았던 어미의 넋은 눈이나 제대로 감았을까…

 

 아비가 아비구실을 제대로 다 못하니 슬하에 딸린 자식들이 고생할 수밖에 그 후, 뒤늦게 영복이 엄마의 상() 소식을 전해 들은 영복이 아버지는 자식들을 먹여 살릴 길이 없었던 터라 영복과 영순에 대한 친자 포기각서 한 장 던져놓고 바람과 함께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고 영복은 그나마 조금은 자랐다며 부산에 사는 고모댁으로 딸려 보냈으며 어린 영순은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대전에 산다는 외가로 먼 친척댁으로 더부살이 떠나는 신세로 생이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천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는 속담에 걸맞게 고모댁으로 따라오긴 했지만, 고모댁도 가정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했던 탓에 영복은 장차 중학교에 갈 등록금 마련을 위해 숨차게 뛰어야 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대전의 먼 친척댁으로 더부살이 간 영순은 눈치 섞인 외할머니의 갖은 노력도 있었겠지만, 친척 아저씨의 고운 마음씨 덕분에 하루 세 끼니 먹을 걱정은 하지 않고 지낸다는 소식을 가끔 전해 듣곤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동갑내기 영복을 만난 것은, 내 나이 열 네 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바깥출입이 어려웠던 나는 행길 가로 나 있는 방문과 현관문을 열어놓고 오래된 습관처럼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날 따라 불볕더위가 온 대지를 삶아 삼킬 듯 기성을 부렸다. 선풍기조차 흔치 못했던 시절이라 주체하기 힘겨울 정도로 등골을 타고 쉴 새 없이 흐르는 구슬땀을 속옷으로 받아낼 수밖에 그래도 미련이 남아 부채바람 맛이라도 볼 심사로 어둔한 손놀림을 부채질하고 있을 때였다. 신문 꾸러미를 옆구리에 한 아름 낀 또래의 한 아이가 집 앞을 쏜살같이 달려 지나가는 듯싶더니 돌아서서 고개를 현관 안으로 디밀며 내가 하던 부채질을 도와주겠다는 것이 아니겠나 처음엔 사양했으나 진드기처럼 붙어 치근덕거리는 그 아이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부채를 내주고 말았다. 그 덕에 시원한 부채바람으로 소나기같이 흐르던 땀을 잠시나마 식힐 수 있었다. 학년이 높아갈수록 많은 돈이 필요할 것 같아 신문 배달은 하고 있지만 눈멀고 귀 먼 사람들이 세상 물정 어두워 해를 입을까 봐 세상소식 널리 전하는 전령사가 될 거라던 그 아이, 그날 이후 영복과 나는 동갑내기 친구가 되었다. 그 당시 그 아이에겐 일각이 여삼추와 같았을 텐데 일주일에 육 일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석간이 배달될 시간이면 어김없이 지나가던 길에 들러 단 오 분이라도 놀아주었던 영복이, 영복이는 정에 굶주려 흘러간 아픈 과거사를 얘기할 때면 가슴을 수없이 쥐어뜯곤 했었다. 자기는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자기 엄마처럼 불쌍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겠다며 내겐 훗날 꼭 글 쓰는 작가가 되어 불우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 널리 알려 또 하나의 영복이가 태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울먹였던 그 아이, 그 아이는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사부리에서 태어난 충청도 산골 촌놈이었다. 비록 촌놈이지만 영혼에 따뜻한 정이 흐르는 영복이를 잊지 말아 달라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내 생애 얼굴 한번 봤으면 좋으리… 인제야 사십오 년 전의 약속을 지키려 희미해진 과거사를 더듬는 날 원망이나 하지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