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발표작

절망(絶望)은 없다/(수필)솟대문학

松竹/김철이 2014. 9. 24. 14:49

절망(絶望)은 없다

 

 내가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시절로 기억되는데 어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중에 <절망(絶望)은 없다> 라는 프로를 장기간 방송했던 적이 있다. 이 프로는 시대가 시대인 만큼 6· 25전쟁이라는 동족의 비극을 치룬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우리나라 대다수 국민이 전쟁의 잔해(殘骸)로 남아 곁을 떠나질 않는 전쟁의 후유증 탓에 힘들고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사는 터라 남들보다 유달리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고 수많은 역경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事例)를 드라마 형식으로 엮어 방송함으로써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힘겨운 삶의 짐을 진 채 살아가는 이들이 이 방송을 듣고 자신들도 불행한 처지의 좌절에 빠져 살지 말고 절망이란 암흑 속에서 희망의 끈을 찾아 미래를 향해 당겨 올라가라는 취지의 실화였다. 뭘 안다고 철부지 어린 나이에 이 프로를 무척 즐겨 들었던 기억이 새롭게 돋아나곤 한다. 지나고 보니 이 뜻은 내 인생의 여정에 수많은 시련과 고난의 씨앗이 산재(散在)해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갖가지 유형별 시련과 고난을 간접적으로 접하고 행복했던 날이 있었으면 분명히 불행의 날도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 죄 많은 세상사라 미리 예비해 두라는 뜻으로 내 생애 마지막 날까지 가슴에 새겨 생활하려 노력 중이다.

 

 사람이 인간사 한평생을 사노라면 행복과 불행의 기로에서 가장 손쉽게 접하는 것이  시련과 절망과 좌절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형의 시련이든 사람이 자생적으로 극복하지 못할 시련은 없다고 단정지울 수 있는 것이 어떤 시련이든 당면했을 땐 죽네사네하여도 천하장사도 막지 못할 것이 시간이고 세월이라, 세월이 흐르다 보면 상처 난 부위에 새살이 돋고 딱지가 앉듯 시련과 고난의 발자취도 점차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크고 작은 차이일 뿐이지 시련과 고난의 고리를 목에 걸고 태어나는 것이 인간사 생이라, 이 땅 위에 살아갈 사람들은 그만큼 시련과 고난의 잔해(殘骸)들과 친숙해 있는 것이다. 고로 인생에서 절망(絶望)은 없다. 라고 단원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건방지고 오만스런 언행(言行)인지 모르지만, 나는 어떠한 종류의 시련이든 온다면 피하지 않고 맞붙어 맞장뜰 준비로 생활해 왔으며 내게 주어진 몫의 시련이라면 시기의 차이일 뿐이지 언제 와도 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안달복달하며 피해서 좌절할 생각은 없다. 물론 이런 여유와 자신감은 태어나서부터 수없이 많은 시련을 겪고 접하다 보니 절로 자생한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 남은 생도 지금과 같은 각오로 살아갈 심사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접한 시련은 너무 어렸던 나이라 기억조차 없지만, 이 시련을 대신 겪으신 어머니 말씀으로는 두 번 다신 생각조차 하기 싫다 하셨다. 세상에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더없이 큰 축복이요, 만인의 마음으로부터 축하받을 일인데 태어난 지 불과 삼 주만에 치유 불가능한 병마의 사슬에 묶이게 되어 평생을 병마와 세상에 둘도 없이 친숙한 벗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인 아들자식을 바라봐야 했던 부모의 심정이야 어이 말로 다하겠는가. 죄가 있었다면 아무런 노력 없이 아버지 뼈와 살을 타고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무위도식(無爲徒食)했던 죄밖에 없는데 어느 누가 판단한다 하여도 벌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실 철없던 어린 시절엔 두 발에 흙 한번 묻혀보고 걷는 것이 나의 큰 소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병든 자식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엔 시커먼 피멍이 들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두 눈엔 피눈물이 절로 솟구칠 부모님의 아픈 심정을 능히 알았기에 이런 표현은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이유는 평생을 지고 가야 할 병마와 사투를 벌이느라 남들보다 철이 빨리 들었던 덕인지 부모님 마음 아파하실까 봐 이 말만은 입 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창밖으로 보는 바깥세상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골목에서 아이들 뛰노는 소리만 들리면 몸은 자연스럽게 창문을 향해 옮겨가곤 했다. 아이들이 축구를 하며 놀 때면 방안에 앉은 나는 축구 그라운드를 누비는 세상 최고의 골잡이 펠레가 되었고, 아이들이 야구를 하며 놀 때면 마루에 앉은 나는 세계 야구의 전설적인 존재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가 되어 다이아몬드 야구 그라운들 활보했었다. 자유로이 뛰놀고 싶으나 그럴 수 없으니 또래 아이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또한, 상상의 전쟁놀이를 할 때면 천하제일의 명장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였고, 동화책을 읽을 때면 세상 최고의 소설가, 수필가, 시인이 되어 노벨문학상을 꿈꾸는 공상(空想)을 하곤 했었다. 이 상상(想像)의 일 중 일부는 소원풀이를 한 셈이지만, 내게 다가오는 시련의 마중물로는 자유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앞에 놓인 시련과 고난의 존재에 대해 한 번도 원망이나 피하고 싶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우리 가족 공동의 시련이자 고민이긴 했지만, 철이 들기 전부터 내겐 수시로 크고 작은 시련과 고난이 엄습(掩襲)해 오곤 했었다. 암울했던 시대에 정부 악법에 따라 부모님의 숱한 피와 땀이 담긴 집도 강탈당해 온 가족이 일어서기 어려운 실의에 빠지기도 했고, 건강했던 부친이 갑작스레 건강을 잃어 직장을 그만두는 통에 가세가 기울어 세들어 살던 남의 집 아래채에서 집세를 올려주지 못하겠으면 집을 비워달라고 밤새 술주정하던 집주인의 불같은 성화도 속으로 삼켜야 했으며, 날 낳아주셨고 오십 년 동안 금이야 옥이야 보살펴 주신 내 부모님과 영원 이별하는 아픔도 겪었지만, 이 모든 시련과 아픔을 통해 나 자신이 더욱 강건해지고, 어떤 시련의 폭풍우가 뒤흔들어 놓아도 의연하게 대처하라는 하늘의 뜻이라 받아들여 먼 훗날 내 살아온 인생을 보고 세상 뭇 장애우들을 비롯해 세상 모든 이들이 작게는 자신들의 부모가 물려주었고 크게는 하늘이 내려주신 소중한 목숨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을 한층 더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리는 인내가 실종된 시대에 살면서 걸핏하면 더없이 소중한 자신들의 생을 헌 신짝 버리듯 하는가 하면 부모 죽인 원수도 아닐 텐데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이들이 다 함께 동고동락해야 할 이 땅에서 개과천선해서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으로.